이 기사는 성공 농업을 일구는 농업경영 전문지 월간 ‘디지털농업’ 1월호 기사입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작은 등불을 수백, 수천 개 켜놓은 듯한 유자. 해풍이 스치는 구릉지마다 가지가 늘어질 만큼 열매가 맺혀 들녘을 환하게 물들이는 유자는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따뜻한 신호다. 이 상큼한 겨울 과일은 남쪽 바다와 맞닿은 전남 고흥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 껍질부터 씨앗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는 유자의 깊은 향을 따라 남녘 끝 고흥을 찾았다.
고흥 유자의 역사는 1000여 년 전, 통일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상왕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유자나무를 들여와 심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긴 항해로 비타민이 부족했던 뱃사람들의 괴혈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하기 위해 유자를 약용으로 가져왔다는 이야기와 함께 남해안 지역에 구전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괴혈병 예방에 유자를 활용했다는 부분이다. 괴혈병은 비타민C가 부족해 발생하는 질환으로, 비타민C는 체내에서 합성되지 않아 음식물을 통해서만 섭취할 수 있는 필수 영양소다. 동짓날 유자차를 마시고 유자를 띄운 물에 목욕하면 1년 내내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옛말도 유자의 효능을 뒷받침하니 공식 사료로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고흥 유자의 유래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나 유자를 과수로 키우는 일은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일반적인 과수는 3~5년이면 상품성 있는 열매가 열리지만, 과거 유자나무는 15년 이상이 걸렸다. 이러한 조건을 뒤바꾼 전환점은 1972년 고흥군 풍양면 대청마을에서 나왔다. 이계환 씨가 탱자나무에 유자를 접목하는 방법을 찾아내면서 3~5년부터 열매를 맺어, 8~10년이면 상품성 있는 유자를 수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기술은 오늘날 국립종자원에 등록된 <대청유자> 품종의 기원이 됐고, 고흥뿐 아니라 전국에 유자가 널리 보급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소득작물로서 유자 농사는 1980년대 들어 본격화됐다. 유자는 산미가 높아 생과를 먹기보다는 가공해 먹는 게 일반적이다. 산업화 흐름 속에서 유자청·유자차 등 가공식품의 수요가 늘었고, 고흥군은 향토산업 개발 사업의 하나로 재배 면적 확대, 가공 기반 조성, 브랜드 육성을 추진했다. 이러한 노력이 맞물리며 고흥은 빠르게 유자 대표 산지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해풍과 일조가 만든 유자 재배 적지
고흥 유자가 국내 유자산업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배경은 지리적 우수성에 있다. 고흥은 한반도 최남단에 있는 반도이자 섬 지역으로, 사계절 온화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지리적표시제 등록공고 자료에 따르면 유자는 연평균 기온이 13~15℃를 유지하되 평균 일교차가 15℃ 내외, 최저 기온이 영하 9℃ 이하로 내려가지 않아야 재배가 가능하다. 또한 일조량은 연간 2400시간 이상, 연평균 강수량이 1500㎜ 이상이어야 한다.
공창기 고흥군유자영농조합법인 대표(70)는 “유자는 겨울에도 휴면하지 않는 작물이라, 온난한 고흥의 기후는 유자가 안전하게 월동하며 고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된다”며 “특히 풍부한 일조량과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은 유자의 껍질을 단단하게 만들고, 특유의 산미와 청량한 향을 깊게 응축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이해를 도왔다.
다수의 지역에서 유자를 생산하고 있지만 해풍의 지속성과 일조 시간에 차이가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고흥은 일조 시간이 압도적으로 긴데, 이는 겨울 기온 변동 폭이 작아 유자의 향과 산도, 껍질 색 등의 품질 안전성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즉 고흥 유자의 진한 맛과 향은 고흥의 지리적 이점이 빚어낸 결과란 이야기다.
오랜 재배 경험 토대로 고품질 유자 생산
유자는 재배 난도가 높은 편에 속한다. 특히 추위에 약해 겨울철 언 피해와 냉해 관리가 수세 유지의 핵심이다. 찬 바람을 막기 위해 방풍림을 두르고, 해안 가까운 과수원은 방풍망을 설치하며, 어린나무는 볏짚으로 감싸는 풍경이 겨우내 일상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유자 농사는 매년이 새로 배우는 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해거리가 심한 편이고, 껍질까지 식품으로 사용하는 작물 특성상 농약 사용에도 신중해야 한다.
이는 병해 관리 난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 대표는 “사과나 배처럼 생과로 유통되는 과수는 표준화된 재배 지침이 문서화돼 있지만, 유자 농사는 농가의 경험에 기반하는 실정”이라며 앞으로 유자 연구가 더 활발히 이뤄지고 그 내용이 축적돼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런 문제의식은 2019년 고흥 유자 농가들이 하나의 영농조합법인으로 힘을 모으게 된 계기가 됐다.
“이제는 농가가 제각각 움직이는 구조가 아니라, 법인이 개화기 관리부터 병해 예방, 시비와 가지치기, 언 피해 대비까지 월별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공지해 농가들이 같은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공 대표의 말처럼 이러한 체계적인 정보 공유는 고흥 유자의 품질 안정화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 올해는 수요처가 증가해 재배 농가들의 소득 증대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지속 가능한 성장 목표로 다각적 노력
고흥의 유자 재배 면적과 농가 수는 최근 유자 시세의 호조세에 힘입어 증가 추세다. 서홍석 고흥군 농업정책과 원예특작팀 주무관은 “재배 면적은 약 660ha, 재배 농가는 약 1600가구 규모”라고 설명했다. 이를 토대로 고흥군은 올겨울 생과 기준으로 생산량이 약 8779t에 달할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국내 유자 생산량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규모로, 고흥 유자가 대한민국 유자산업의 중심임을 입증한다.
다만 급격한 기후변화가 고흥의 유자산업에도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부상했다. 이에 고흥군은 다각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2024년 농업기술센터 내에 설립한 유자연구소는 통합 법인과 협력해 프리미엄 유자 생산에 적합한 품종 육성과 수출 시장을 겨냥한 가공 제품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공 대표는 특히 신품종과 관련해 “내한성·내병성을 갖춘 계통은 물론 유자가 식품 원료로 쓰임이 많은 만큼 과즙 수율이 우수한 품종 개발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동시에 고흥군은 가공 기반과 유통망 확충을 통한 산업 안정화를 꾀하고 있다. 서 주무관은 “브랜드 통합과 판로 확대를 위해 고흥군의 자체 유통 플랫폼인 ‘고흥몰’을 구축해 산지 직거래 기반을 넓히는가 하면, 수출 전 과정을 행정이 직접 관리·지원하고 농어민은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는 고흥군형 수출 모델이 큰 성과를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고흥군은 2024년 농수산물 수출액 9970만 달러를 기록하며 전국 군 단위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수출 1위를 달성했다. 그 가운데 고흥 유자의 비중은 작지 않다. 동남아시아는 물론 유럽 등 세계 각지로 퍼져나간 고흥 유자 가공품은 연 9000t에 달한다. 지난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만찬에서 고흥 유자 원액을 사용해 만든 막걸리가 공식 건배주로 선정되며 고흥의 유자산업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이후 수출개척단은 독일 등 유럽 현지에서 고흥 유자에 대한 뜨거운 반응을 확인했고, 500만 달러의 수출협약을 체결하는 등 유의미한 성과를 이뤄냈다. 기후변화로 재배 여건이 까다로워지는 시대지만 고흥의 농가와 행정의 빠르고 치밀한 대응은 고흥 유자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에 단단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글 서진영 | 사진 남윤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