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고성진 기자]
논콩·가루쌀·밀 등 전략작물 생산자들이 오락가락한 정부 방침으로 정책 신뢰성이 떨어지고 영농 현장의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쌀 생산 감축이라는 목표에 매몰돼 식량작물 전반에 대한 중장기적 고민과 전략이 실종됐다며, 식량 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강조했다. 8일 농정연구센터가 진행한 식량작물 생산자들과의 신년좌담회에서는 현장의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농정 현실을 진단하고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올해 콩 재배면적 계획 20% 축소
가루쌀은 절반 수준으로 줄어
“언제는 심으라더니 이제와 축소”
영농 현장 혼란·정책 불신 키워
▲“언제는 심으라고 하더니” 정책 신뢰성 잃었다=참석자들은 논콩이나 가루쌀과 같은 전략작물 직불 대상 작물이 얼마 전까지 권장되다가 예고 없이 축소 조정되면서, 일관성 없는 정책이 영농 현장의 혼란과 정책 불신을 키우고 있다고 진단했다.
서산간척지에서 가루쌀을 생산하는 임종완 서산간척지영농조합법인 대표는 “3~4년 전부터 충남에서 처음으로 가루쌀 생산에 뛰어들었고 지난해 150ha 재배 성과를 거뒀다”며 “하지만 재배면적 축소 등의 정책 선회로 현장에선 정책 신뢰가 무너졌다. 정부 정책과 반대로 해야 돈을 번다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장수용 한국논콩자조회 회장은 “지난해 쌀 가격이 정부 목표와 근접하게 유지된 점은 긍정적이지만, 대체 작물들은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콩은 갈곳이 없고, 가루쌀은 방향성마저 잃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대체 작물의 안정적인 생산 기반을 마련해야 하는데, 출구 없이 생산만 독려하다 보니 현장의 혼란이 반복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세욱 인천대 경제학과 초빙교수는 “2026년도 전략작물직불제 계획을 보면 콩과 가루쌀은 사실상 방향성이 보이지 않는다”며 “콩 재배면적 계획은 2025년 대비 20% 감소했고 가루쌀은 절반 수준으로 줄였는데, 이는 ‘콩과 가루쌀은 희망이 없다, 포기하겠다’는 얘기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전임 장관이 ‘가루쌀은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하면서 생산 확대 정책을 펼친 지 불과 3년 만에 방향을 완전히 바꾼 것”이라며 “가루쌀 생산자 입장에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대안으로 제시된 수급조절용 벼를 올해 2만ha까지 확대하겠다고 하지만, 식량안보 차원에서 대체작물 선택이 중요한 상황에서 1~2년 사이 정책 설계가 오락가락 한다면 현장에서 정부를 신뢰하고 재배를 할 수 있겠냐”라고 반문했다.
기후위기 속 식량작물 전략 부재
재해보험 강화도 ‘언 발 오줌누기’
▲쌀 감축만 외칠 뿐 식량작물 생산기반 전략도 부재=대체작물의 수요·판로, 자급률 등은 물론 직불금 체계와 기후위기 대응 등을 아우르는 전략이 부재하다는 문제제기도 이어졌다.
유재흠 하서미래영농조합법인(부안군우리밀영농조합법인) 상임이사는 “정부가 기후변화에 대응해 식량안보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방향은 제시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디에 전략적 역량을 집중할지에 대한 그림은 보이지 않는다”며 “재해보험 강화 등은 언 발에 오줌누기 식으로, 앞으로 닥칠 문제에 대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유 상임이사는 “우리나라의 경우 2020년대 들어 작물별·지역별로 피해가 번갈아 집중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빈도가 늘어나고 강도가 세지고 있다”면서 “세계 기구에서 예측하듯이 2030년대 이후 세계 식량 감소는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기후변화는 생산량 감소는 물론 품질 하락이 동시에 작동한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며 “지난해 일본의 쌀 대란 문제 역시 정책 실패와 급격한 농지 감소도 원인이지만, 무엇보다 품질 문제가 컸다. 절대적인 생산량 부족보다 오히려 1등급 출현율이 현격히 떨어져 밥쌀용으로 쓸 수 있는 쌀들이 적어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기후위기 대응 방안으로 농법 전환과 농지 이용 방식의 개선 등을 꼽았다. 유 상임이사는 “최근 3년간 생산 단지 내 친환경 농법으로 키운 곳은 피해를 입지 않고 버티고 있다. 전략적으로 농법의 변화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며 “여기에 더해 이상기후 피해가 심각해지면서 벼든 콩이든 탄력적으로 농지를 이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농지 제도를 정교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물 문제 해소에 대한 대책도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임종완 대표는 정부의 잦은 쌀 생산 조절 개입이 재배면적 감소와 후계 단절 등 쌀 생산 기반 약화로 이어졌다고 진단했다.
임 대표는 “쌀 전업농은 개인별 규모화, 들녘별경영체는 지역별 집단화를 통해 생산비 절감을 유도해 왔다. 궁극적으로는 쌀 생산 감축이라는 정부 의도에 의해서다. 하지만 쌀이 남아돈다는 이유로 대농 중심 정책은 소농 정책으로 바뀌었다. 공익직불제 시행으로 직불제 지원 면적 대상을 30ha로 제한하고, 소농직불금을 주고 있다”며 “이런 정책 여파로 벼 재배면적은 2004년 100만ha에서 2024년에는 70만ha 아래로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쌀 생산 농민에만 책임을 전가하는 정책을 계속하면 생산 기반은 더 약해질 수밖에 없다”면서 “재배면적을 더 줄이기보다 현 70만ha 범위에서 어떤 작물을 생산하든 농민에게 유연성과 자율성을 부여해야 지속가능성이 유지된다”고 강조했다.
정교하지 않은 대체작물 생산 설계가 현장 피해로 되돌아오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송동흠 우리밀세상협동조합 운영위원장은 “농가가 전략작물을 선택할 때 비가 계속 오면 가루쌀을 심고, 기후가 받쳐주지 못하면 가루쌀 모내기를 준비하다가 엎어버리고 콩을 심는다. 리스크가 가장 적은 콩으로 쏠리다 보니 밀은 후순위로 밀린다”며 “정부가 체계를 잡지 않으니 밀 자급률 제고 방안 자체가 전략작물의 혼선 속에서 성립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수요와 판로를 고려하지 않는 측면도 문제로 제기됐다. 송 운영위원장은 “일본은 15년 전부터 수입밀 대체용으로 가루쌀을 생산해 왔지만, 연간 밀 소비량 500만~600만톤에서 가루쌀 소비는 5만톤으로 1% 수준”이라며 “우리도 수입밀 250만톤의 1% 수준인 2만톤 정도가 가루쌀의 현실적인 수요라는 점을 정확히 제시한 뒤 재배를 권장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가공과 소비 기반이 취약한 우리밀이 최근 K-라면 수출 확대로 오히려 입지가 줄어들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송 운영위원장은 “수입밀 라면 물량 수요가 급증하다보니 기존에 우리밀 업체가 위탁 제분을 맡기는 가공(제분)업체가 물량을 받아주지 않아 지금 우리밀 라면이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며 “정부가 이런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갖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직불금 등 단순 생산 지원 넘어
소비·수급까지 아우르는 전략 필요
10년 내다보는 ‘과감한 정책’ 요구
▲과감한 정책 설계, 전달 체계 구축 필요=중장기 관점에서 과감한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유재흠 상임이사는 “밀 전략작물 직불금을 ha당 5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확대했지만, 투입 방식이 문제”라며 “소비 측면에도 지원해 우리밀 가격을 낮추는 방안을 유도했어야 하는데, 단순 생산 지원으로 간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10년 단위로 내다보는 과감한 정책 설계가 필요하지, 올해와 내년, 이렇게 단기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홍상 농정연구센터 이사장은 “중장기 정책 설계로 가기 위해서는 전략과 선택에 대해 생산자와 정책 당국 간의 전략적 컨센서스를 쌓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명헌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 정책 시스템은 5년 단위로 바뀌는데, 농정은 비교적 연속성이 유지돼 왔다”며 “하지만 최근 태양광이나 가루쌀처럼 이전 정부 정책이 급격히 뒤집히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현장의 문제 인식과 해법을 토대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정책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의사결정 구조와 정책 전달 체계가 부재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엘리트 관료와 경제학 중심의 정책 설계가 현장과 점점 괴리되고 있다”며 “수많은 위원회가 있지만 작동 방식이 지나치게 형식적인 만큼, 이를 전환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고성진 기자 kosj@agri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