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고성진 기자]
대전·충남을 비롯해 광주·전남, 대구·경북, 부산·경남 등 전국이 행정통합 논의로 들끓고 있다. 하지만 지자체 간 정치적 셈법과 속도 경쟁에 매몰되면서, 통합이 ‘수도권 집중 해소’와 ‘지방균형발전’의 실질적 대안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1월 28일 지역재단과 충남·대전시민사회단체 주최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은 행정통합을 ‘만병통치약’처럼 밀어붙이는 추진 행보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특히 지방자치의 역행, 농촌 붕괴, 교육 공백 등 지역사회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쏟아졌다.
의사결정 구조 소수에 집중···‘주민자치 소멸’ 등 민주주의 역행 우려
전문가들은 행정통합이 기초자치단체의 종속화, 주민접근성 저하를 초래해 지방자치를 악화시킬 것으로 봤다.
곽현근 대전대 행정학과 교수는 “통합 정부가 더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되지만, 의사결정 구조는 소수에게 집중돼 주민과 권력의 거리는 멀어지게 된다. 책임 주체는 흐려지며, 주민은 주체가 아닌 행정의 대상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며 “이는 지역정체성과 민주주의 기반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황종규 동양대 공공인재학부 교수는 “문제가 발생하는 양태와 장소는 기초 정부와 읍면동 단위인데 권한과 재정을 초광역 정부에 집중시키는 것은 문제를 악화시키게 된다”면서 “현재도 주민투표나 소환제 등 통제 장치가 작동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통합은 ‘주민자치의 소멸’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대표는 경남 산청의 생수 공장 인허가 사례를 들며 섣부른 ‘광역화’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는 “산청군은 공장 증설을 반대하고 있지만, 생수 공장의 인허가권을 갖고 있는 경남도가 인허가를 내주고 있다. 이처럼 행정과 주민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무서운 일”이라며 “이를 보완하려면 기초지자체의 권한을 강화해야 하는데, 현재 통합 논의에서는 이 부분이 빠져있다”고 말했다.
도시 주변부로 농촌 편입, 농촌공동체 무너질 수도···지역 소멸 가속화 불가피
해외 사례와 과거 경험에 비춰 볼 때 농촌과 지역 소멸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잇따랐다.
하승수 대표는 “미국이나 독일 등 연방제 국가에서 광역 통합 사례는 없으며, 프랑스가 22개 ‘레지옹’을 13개로 조정한 경우가 있으나 우리의 읍면에 해당하는 코뮌이 3만6000개에 달할 정도로 우리와 여건이 다르다”며 “대대적으로 기초지자체 통합을 추진한 일본에서도 주민서비스의 질이 저하되고, 지역 활성화에 마이너스가 됐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황종규 교수도 “광역시와 광역 도를 통합하는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라면서 “국내에서는 1995년 도농통합(복합)시를 추진한 사례가 성격상 유사한데, 실제 도농통합시는 흡수된 군 지역을 제대로 성장하거나 활용하지 못하고 방치해 주변부의 심각한 쇠퇴와 낙후를 가져왔으며 현재 인구 위기를 겪는 시는 대부분 도농통합시”라고 지적했다.
박상일 지방분권전남연대 이사장은 “광역 행정통합 추진 시 초광역 교통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개발 이익은 증가하는 반면 농촌지역은 빨대효과로 인해 상권 몰락이 불 보듯 뻔해진다”며 “농촌이 도시의 주변부로 편입되면 농촌의 경제·사회·문화 등 제반이 타격을 입어 농촌공동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인구감소 지역의 교육 공백 문제도 언급된다. 노한나 청주 만수초등학교 교감은 “인구감소 지역으로 경력이 낮은 신규 교사의 쏠림 심화, 업무 과중으로 인한 교육 불평등이 심화될 수 있다”며 “기초 지자체와 교육지원청을 중심으로 권한이 이양되고, 협력과 연계 방안이 제도적으로 모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통합 아닌 연합·거버넌스가 먼저···주민 참여 공론화 통한 대안 마련 필요
전문가들은 효율화와 규모화를 앞세운 행정통합 만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주민이 참여하는 공론화를 통한 대안 마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곽현근 교수는 “행정통합은 문제의 성격은 바뀌었는데 처방은 과거에 머무른 선택”이라며 “팬데믹, 기후위기, 사회적 재난, 지역 소멸 같은 문제에 필요한 것은 통제 확대가 아니라 적응 역량이며, 빠른 조정과 방향 전환이다. 하나로 합치면 효율적이며, 규모가 커지면 경쟁력이 생긴다는 20세기형 행정 패러다임으로 21세기의 문제를 풀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창원통합시(마산창원진해) 사례에서 보듯 통합은 기대했던 성과를 자동으로 만들어내지 않으며, 통합 이후 갈등도 여전하다”면서 “실행되면 되돌릴 수 없을뿐더러 ‘성공하면 정치의 성과, 실패하면 지역 몫’으로 남는 위험성이 큰 만큼 충청광역연합 등 연합이나 거버넌스를 통한 ‘공유통치 원리’를 제도화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강조했다.
창원통합시 사례에 주목한 박재욱 신라대 행정학과 교수는 “첫째 통합이 융합으로 가지 못해 여전히 세 지역이 섞이지 않고 있으며, 두 번째는 하향식 통합의 후유증이 아주 심하다는 것이다. 기초지자체도 이 정도인데, 광역 단위 행정통합은 굉장한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며 “세번째로 재정 배분, 사업 우선순위 등의 시스템 고민이 부재해 창원 위주로 지원이 이뤄지면서 마산과 진해가 침체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됐다”고 지적했다.
박진도 지역재단 상임고문(충남대 명예교수)도 “규모의 비대화가 ‘수도권 일극체제’의 해답이 아니다”라며 “인구 400만명에 육박했던 부산이 왜 광역시 최초로 소멸위험 지역이 됐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규모가 작아서 쇠퇴한 것이 아니라 중앙집권적 구조 속에서 독자적인 발전 전략을 수립할 권한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양준호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역 소멸의 근본 원인을 지역의 부가 외부로 빠져나가는 ‘구멍난 양동이’ 같은 경제 구조라고 진단하며, “지역공동체를 중심으로 ‘축소된’ 경제시스템을 강화해야 하는데, 행정통합이라는 방향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추진 과정의 문제점도 도마 위에 오른다. 하승수 대표는 “지역 불균형 문제의 해법은 서울과 수도권이 가진 특권을 없애는 것이 핵심인데, 서울에 준하는 특별시를 만들어준다거나 재정 지원을 약속하는 식의 접근은 ‘공허한 환상’을 불러 의사결정을 왜곡시킨다”며 “반도체 클러스터, 교통망 확장 등 수도권 일극 집중을 부추기는 국가 정책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비수도권 지자체 통합을 통한 큰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박진도 상임고문은 절차적으로 충분한 공론화를 통한 추진을 강조했다. 그는 “현재 공론화 과정은 짧은 기간 동안 타운홀미팅과 토론회를 몰아치듯 진행하며 ‘답정너’식 결론을 유도하고 있다”면서 “최소 1년의 충분한 공론화 이후 주민투표를 통해 최종 결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재섭 대전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사무처장도 “행정통합은 숙의를 전제로 단계적 로드맵을 거쳐 추진돼야 한다”며, 특별법 내 ‘주민투표 의무화’ 조항 삽입을 주장했다.
고성진 기자 kosj@agri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