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성공 농업을 일구는 농업경영 전문지 월간 ‘디지털농업’ 2월호 기사입니다.
주황색 감이 줄지어 선 덕장에 들어서자 침이 꼴각 넘어간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곶감 말리는 풍경이다. 일반적으로 과수는 수확하고 나면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시기에 접어들지만 곶감 농사는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감을 깎고 엮고 매달아 말리기까지 정성 들여 살펴야 하는 일이 겨우내 지속된다. 대목인 설을 앞두고 곶감 말리기가 한창인 경북 상주에서 겨울 별미의 속살을 들여다봤다.
감은 크게 단감과 떫은감으로 나뉘는데, 우리 땅에는 떫은감이 주를 이뤘다. 오늘날 주로 중부 이남에서 재배되는 단감은 일본에서 개량된 품종을 들여온 것이다. 오랜 세월 우리 식문화에서 감은 ‘시간’을 머금어야 맛볼 수 있었다. 충분히 익힌 홍시, 잘 말린 곶감으로 말이다.
곶감이 호랑이도 멈추지 못한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했다는 전래동화가 전해질 만큼 곶감의 역사는 깊다. 특히 상주 곶감은 ‘세종실록지리지’와 ‘예종실록’에 주요 공물로 기록돼 예로부터 주산지로 이름을 알렸다.
곶감에 제격 ‘상주둥시’가 만든 명산품의 토대
상주 곶감을 지탱하는 힘은 고유 품종인 <상주둥시>에서 나온다. 떫은감 중에서도 과육이 치밀하고 단단한 편에 속하는 상주둥시는 건조 과정에서 쉽게 모양이 무너지지 않는다. 이는 겉은 단단하면서도 속은 탄력 있는 곶감 특유의 식감을 만들어낸다. 크기가 비교적 일정하고, 둥근 형태인 것도 상품성에 긍정적인 요소다.
한편, 상주둥시는 타닌 함량이 높아 혀끝이 아릴 만큼 떫지만 곶감용으로는 이만한 게 없다. 건조 과정에서 타닌 성분이 당분으로 변해 농축되는데, 생과가 떫을수록 곶감의 단맛은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 경북 상주 지역 곶감 농가는 상주둥시 품종으로 통일해 품종 고유의 유전적 특성을 지키는 동시에 품질의 균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곶감은 ‘가공품’으로 분류되지만, 그 출발은 감 농사다. 맛있는 곶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대한 감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수확해야 하고, 수확 후에는 감이 물러지기 전에 바로 껍질을 깎아 건조하는 것이 기본이다.
농업 기술 발달로 원료 감 보관이 쉬워졌고, 가공과 유통에 전문성이 요구됨에 따라 근래에는 농사와 가공·유통이 분리되는 비중이 늘고 있다. 그럼에도 상주에서는 아직 상당수의 곶감 농가가 일부라도 감나무를 재배한다. 특히나 상주둥시는 고욤나무에 접을 붙여 키우는 전통 방식으로 재배한다.
작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품질의 기준점을 잡는 데 감 농사는 매우 중요하다. 대를 이어 곶감 농사를 짓는 안민정 상주아람곶감영농조합법인 대표(49)와 남편 신문정 씨(52)도 전체 생산량의 20%는 직접 재배, 80%는 지역 내 농가에서 매입하고 있다.
감나무는 심은 후 상품성 있는 열매가 열리기까지 십수 년이 걸리지만 제대로 키워내면 대를 이어 결실을 주는 고마운 과수다. 감 농사를 전담하는 신씨는 “곶감은 과피를 깎아 건조하지만, 수확할 때 과피가 상하면 멍이 들거나 병해충이 침투해 결국 과육까지 상한다”며 “감 자체가 좋아야 좋은 곶감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관수시설을 정비하고 감나무 수고를 낮춰 재배하는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등 고품질 감 생산과 작업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감을 천천히, 끝까지 말릴 수 있는 기후 조건
상주 곶감의 품질에는 지리적 영향도 크게 작용한다. 감을 건조해 곶감으로 만드는 일은 단순히 수분을 빼는 과정이 아니다. 감 속에 머물던 수분이 천천히 겉으로 이동하도록 시간을 들이는 일에 가깝다. 이 과정이 균일하게 이어져야 감이 상하지 않고, 곶감 특유의 깊은 단맛과 식감이 완성된다.
안 대표 역시 “천천히, 끝까지 건조해야 좋은 품질의 곶감으로 완성된다”고 강조한다. 상주 지역이 곶감 산지로 이름을 얻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상주는 내륙에 위치해 곶감 건조기인 11~12월 사이 공기가 비교적 안정적이며, 기온과 습도가 급격히 높아지지 않는다. 이 시기 낮은 기온은 수분 증발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을 막고, 비교적 안정적인 습도는 곰팡이로 인한 손실을 줄여준다.
또한 곶감은 바람이 강해서도, 없어서도 안 된다. 멈추지 않는 공기의 흐름이 곶감 품질의 핵심 요소다. 이 시기 상주에 완만하게 불어오는 북서계절풍은 감이 쪼그라들지 않고 속까지 고르게 마를 수 있게 돕는다. 안 대표는 “올해는 설이 늦어 곶감 말리기가 더 좋다”며 반가움을 숨기지 못했다.
타닌 성분이 산화·숙성되며 과육은 주황색에서 흑갈색으로 변하고, 표면에는 하얀 분이 올라온다. 완전 건조된 건시는 수분 활성도가 낮아 비교적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 곶감이 조상들의 지혜가 응축된 저장식품으로 불리는 이유다.
기후변화 대응, 명절 집중 소비구조 개선 노력
상주 지역은 전국 곶감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국내 최대 곶감 주산지다. 상주시농업기술센터에 따르면 3500여 농가가 연간 약 1만 9000t의 곶감을 생산하고 있다. 최근에는 홍시와 건시 사이의 식감과 단맛을 선호하는 소비자가 늘면서 ‘반건시’ 비중도 함께 확대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저장성과 안정성 면에서는 건시가 유리하지만, 반건시는 건시보다 짧은 기간 건조하고 출하할 수 있어 산지에서는 날씨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농업 현장에서는 건시와 반건시를 두고 품질의 우위를 가르지는 않는다. 상주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농가가 건시와 반건시 모두 자연건조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사실 생산 환경과 목적에 따라 기계건조를 활용하는 산지도 적지 않다.
기계건조는 열과 제습 설비를 활용해 건조 환경을 일정하게 관리하는 방식으로, 기후 영향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 강점이 있다. 다만 자연건조와 기계건조는 건조 과정과 그에 따른 결과물의 성격이 다르다.
상주에서 고집하는 자연건조는 방임이 아니다. 안 대표는 “기후변화에 따라 매년 예기치 않은 상황들이 나오지만 예전부터 해온 방식과 경험으로 그 어려움을 딛고 나갈 수 있다”며 상주 곶감 농가의 자부심을 표했다. 이 맥락에서 상주 곶감은 건시로 정체성을 지키고, 반건시로 소비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다만 기후변화의 변동 폭이 심화되는 추세이고, 그에 대한 대비 역시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상주시 곶감관리팀 관계자는 “포장재 지원, 저온창고 보급 등 통상적인 보조 사업뿐 아니라 기후변화에 대비해 보다 효과적인 자연건조 방식 또한 모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곶감 농가는 ‘1년에 한 번 구매하면 단골’이라며, 명절에 집중된 소비구조를 연중 판매로 분산하는 것을 또 하나의 과제로 보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에는 연중 판매와 함께 세대 확장을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곶감치즈호두말이’ 같은 레시피가 고급 디저트와 와인 안주로 호응을 얻으며, 곶감은 이제 명절 제수 용품을 넘어 사계절 즐기는 ‘K-디저트’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매년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매년 더 좋은 곶감을 만드는 게 목표”라는 안 대표의 말에 마음이 든든해진다. 전통의 가치를 지키려는 농가의 고집과 변하는 시장에 발맞춘 행정의 지원이 맞물리며 상주 곶감은 겨울 한 철의 별미를 넘어 지속 가능한 미래 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글 서진영 사진 남윤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