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시린 겨울바람이 불면, 저도 모르게 꽁꽁 언 몸을 녹여줄 따뜻한 차 한잔이 생각이 납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감기 기운이라도 있을 때면 저는 붉은 기운이 감도는 ‘대추차’를 마십니다.
대추차를 볼 때마다 지금은 아내와 추억으로 얘기하는 신혼 시절이 떠오릅니다. 당시 저는 매사 조심스럽고 소심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속으로 삭이는 편이었습니다. 아내 역시 갓 입사한 신입 사원이라 눈치껏 행동하랴 업무 익히랴 하루하루가 쉽지 않았습니다. 둘 다 밖에서는 태연한 척했지만, 집에 돌아오면 알게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로 한숨을 쉬기 일쑤였습니다.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하고, 소화도 잘 안 되고, 잠을 설치는 날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매주 일요일이면 저는 잘 말린 대추를 한 대접 꺼내 깨끗이 씻고 냄비 가득 물을 부어 진하게 우러날 때까지 푹 끓여 냈습니다. 집안 가득 퍼지던 달큰한 향기. 대추차 한잔을 아내와 함께 마시며 그렇게 일년 이상 조용히 주말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 시절 대추를 끓이는 일은 한 주의 시작과 끝에서 아내와 나를 위해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위로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부부가 겪던 답답함은 ‘화병’ 증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흔히 ‘속에서 천불이 난다’고 표현하는 ‘화병’은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가 반영된 질환입니다. 정신건강의학계의 교과서로 불리는 미국정신의학회의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에도 우리말 발음을 살린 ‘화병(Hwa-byung)’으로 등재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