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양돈업계가 사상 최대 위기에 빠졌다. 치료제·예방백신이 없는 치사율 100%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올초 전국을 휩쓸면서 역대 최다 발생 기록을 세우고 있어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9개월간 잠잠하던 구제역마저 수도권 소 사육농가 2곳에 연달아 발생하면서 가축전염병 방역 전선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방역당국은 철저한 차단과 농장 방역을 강조하지만 현장에선 오락가락 원인 규명에 극도의 피로감을 호소하는 중이다. 농업계에선 과거 ‘스페인의 잃어버린 양돈산업 30년’ 사례를 상기하며 15년 전 ‘구제역 3조원 교훈’을 잊어선 안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ASF 중앙사고수습본부에 따르면 올해 ASF 발생 사례는 20건 돌파를 눈앞에 뒀다. 23일 오전 9시 기준 발생 사례는 19건에 이른다. 발생지역도 충북·제주를 빼고 사실상 거의 전국에 퍼져 있다. 경기 6건, 강원 2건, 충남 3건, 전북 2건, 전남 3건, 경북 1건, 경남 2건 등이다.
ASF는 2019년 국내 최초 발견됐다. 그해 발병건수는 14건으로 지금까지 최다 발생 기록이었지만 올해는 두달도 안돼 이를 가뿐히 넘겼다.
원인 규명도 난항을 겪고 있다. 1월만해도 중수본은 인위적 유입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특히 농장 종사자 숙소·의복·신발에 주목했다. 음식물이 담긴 냉장고까지 탈탈 털었지만 이후에도 ASF 바이러스는 보란 듯이 국내 곳곳에서 확인됐다.
중수본이 다시 꺼내든 카드는 ‘사료’다. 20일 내놓은 역학조사 중간결과를 통해 사료 원료(돼지 혈장단백질)에서 ASF 바이러스 유전자가 검출됐다는 것이다. 중수본 관계자는 “감염력 있는 ASF 바이러스가 있는지 여부는 추가 확인이 필요하지만 유전자가 발견된 이상 사료를 통한 유입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해당 사료의 사용 중지와 소각을 권고하는 한편 ‘사료관리법’에 따라 추가 검사와 행정처분을 하겠다”고 밝혔다.
오락가락 원인 규명에 농가들은 허탈하다는 반응이다. 양돈농가들은 “사료에서 바이러스 유전자가 발견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농가에서 어떻게 사료 안전성까지 챙길 수 있느냐”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구제역도 불안감이 높은 상황이다. 올해 1월30일 인천 강화군의 소 사육농장서 발병한 이후 2월19일 경기 고양 한우농장에서 추가 발생했다. 두 지역간 거리는 20㎞ 남짓이어서 수평 전파 가능성도 우려된다.
구제역은 2010∼2011년 전국에서 크게 발생해 국내 축산업계에 커다란 생채기를 남겼다. 전국 75개 시·군에서 소 15만1000마리, 돼지 331만8000마리, 염소 8000마리 등 가축 346여만마리가 살처분됐고 방역과 매몰 처리에 연인원 200만여명이 투입됐다. 방역과 매몰 보상비 등에 대한 재정소요액만 3조원에 달했다.
1957년 ASF를 겪었던 스페인·포르투갈은 돼지산업을 재건하는 데 꼬박 30년이 넘게 걸렸다. 전국한우협회 관계자는 “구제역이 발생한 소 사육농가는 살처분 보상금을 최대로 받는다 해도 재정적 피해만 수억원”이라며 “농가 방역수칙 준수만 독려할 게 아니라 예방과 확산 방지 차원의 실질적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보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