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전원의 꿈 일구는 생활정보지 월간 ‘전원생활’ 3월호 기사입니다.
우리는 ‘밥은 먹었냐’고 안부를 묻고, ‘식사 한번 하자’고 다음을 기약한다. 그만큼 먹는 행위를 중요하게 여긴다. 잇따라 흥행한 요리 경연 프로그램은 먹는 일에 진심인 한국인에게 ‘미식(美食)’이란 키워드를 제시했다. 좋은 음식을 즐기고 싶은 욕구를 자극했고, 미식의 정점인 파인 다이닝이 각광받고 있다. 단연 돋보이는 건 ‘한식 파인 다이닝’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한식이 셰프의 손길을 거쳐 미식이자 작품이 돼 식탁에 오른다. 부산 기장군에 있는 ‘레스토랑 엠비언스’에서 한식 파인 다이닝의 진가를 목격했다.
한식 파인 다이닝의 위상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두드러졌다. 전 세계 미식의 중심지인 미국 뉴욕에 있는 한식 파인 다이닝 몇 곳이 미슐랭 가이드에 이름을 올리며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뜨거운 관심에 힘입어 국내에도 특색 있는 한식 파인 다이닝들이 문을 열었다. 이미 미식 문화가 확산한 수도권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생겨났다는 점에서 대중의 높은 관심도를 유추할 수 있다. 같은 한식을 기반으로 해도 셰프마다 코스를 풀어내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도 흥미로운 요소다. 그중 부산 기장군에 있는 ‘레스토랑 엠비언스(이하 엠비언스)’는 부산의 맛을 담아낸 코스로 미식가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로컬 식재료가 선물한 특별함
엠비언스를 운영하는 엄현주 오너 셰프는 약선음식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이후 요리 아카데미인 서울 츠지원에서 배움에 깊이를 더했고, 한식 파인 다이닝으로 미슐랭 스타를 받은 이종국 셰프 밑에서 수련했다.
“이종국 선생님은 식재료를 다양하게 쓰셨어요. 전국 팔도에 있는 식재료를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엠비언스는 한식을 기본으로 하되,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컨템포러리(Contemporary) 한식’을 추구한다. 코스는 계절에 따라 구성이 달라지며, 그때만 맛볼 수 있는 제철 식재료가 포함된다. 여기까지는 다른 한식 파인 다이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엠비언스가 특별한 이유는 ‘로컬 식재료’에 있다.
“식재료가 가장 중요해요. 부산과 기장에서 나는 식재료를 중점적으로 사용하는 게 엠비언스의 콘셉트예요. 이곳의 식재료가 참 귀해요. 양이 많지 않아서 대부분 지역 안에서 소비되거든요. 해녀들이 채취하는 말똥성게도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어려운 식재료죠. 로컬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어요. 지역 상생과 지속 가능성 측면에서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직접 텃밭을 조성해 채소도 기른다. 매일 수확한 싱싱한 채소를 음식에 쓴다. 노지에서 강한 햇빛을 받고 자란 채소는 단단하면서 맛이 진하다고.
엄 셰프는 식재료 본연의 맛을 강조한다. 식재료가 주인공이고, 양념이 조연이다. 육수를 낼 때도 메인 식재료의 맛을 헤치지 않도록 한다. 약선음식을 공부하며 익힌 재료의 특징이 도움이 됐다. 사계절에 따라 식재료를 다양하게 쓰는 것은 한식 파인 다이닝의 강점이다. 엄 셰프는 손님들이 로컬은 물론 전국에서 나는 제철 식재료를 경험하도록 메뉴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다.
“한식 식재료 맛은 익숙하겠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맛을 표현하려고 해요. 식재료를 이런 맛으로도 즐길 수 있단 걸 알리고 싶어요. 또 한식은 장이나 장아찌처럼 시간을 길게 들여야 하는 것들이 많아요. 여러 면에서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힘든 영역이에요.”
오감(五感)을 깨우는 음식
엠비언스의 대표 코스는 디너인 ‘시그니처 코스’다. 이번에 소개하는 시그니처 코스는 지난 2월까지 진행된 겨울 구성이다. 메뉴는 ‘한입거리’부터 ‘다과’까지 총 9종이다. 식재료는 수급 상황에 따라 대체되기도 한다.
자리마다 코스 순서가 적힌 메뉴 카드가 놓여 있다. ‘굴’ ‘고사리와 전복’ ‘쌀’처럼 식재료만 적혀 있기도 하다. 어떤 모습의 음식이 나올지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메뉴가 나올 때마다 설명이 곁들여진다.
코스를 시작하는 ‘한입거리’는 세 가지 음식으로 정갈하게 차려진다. 눈으로 음식을 먹는다는 말이 이해가는 플레이팅이다. 직접 담근 동치미 위에 고추장·매실·소금·참기름으로 버무린 방어와 잘게 썬 방아잎을 올린 것부터 생선 살을 초절임한 기장 다시마로 감싼 어선말이, 부산 금정산성 막걸리로 발효해서 쪄낸 증편을 기장 다시마 버터와 대변항 멸치 절임 등과 함께 먹는 기장삼합까지. 로컬의 맛을 한 접시에 담았다.
‘텃밭 겨울 채소’는 텃밭에서 재배한 채소로 만든 샐러드다. 뚜껑을 열면 연기가 피어오르며 코로 먼저 맛보라는 듯 사과나무 훈연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채소는 가볍게 구운 뒤 매실장아찌 드레싱을 넣어 섞었다. 가운데 있는 근대 쌈은 지리산 자보리와 고로쇠 된장으로 무친 나물 등으로 안을 채웠다. 근대 쌈 아래엔 얇게 썬 단감이 깔려 있다. 채소 본연의 맛과 아삭함이 살아 있는, 투박한 듯 섬세한 조합이다.
반투명한 그릇에 나오는 ‘굴’은 그릇마저 음식의 일부임을 깨닫게 한다. 삼배체 굴을 구워 기장 미역 소스를 올렸다. 묵직한 질감의 소스는 고소하면서도 짭짤해 굴과 어우러지며 바다의 풍미를 전한다. 소스를 맛보고 바질페스토 같다는 의견을 전하는 손님도 있다고.
한식 하면 밥이 빠질 수 없다. 엠비언스는 부산에서 개발한 쌀 품종인 ‘황금예찬’을 사용한다. ‘반상’은 밥·국·고기·반찬이 함께 나온다. 밥은 황금예찬과 가을에 텃밭에서 수확한 늙은 호박을 섞어서 지었다. 밥의 찰기와 호박의 단맛이 꽤나 조화롭다.
국은 기장 미역과 말똥성게가 들어간 미역국이다. 미역은 해풍으로 말린 것으로 진한 흑색이다. 고기는 한우에 천리장을 발라 구웠다. 천리장은 씨간장에 수제 육포를 갈아 넣은 장으로 감칠맛이 돈다. 반찬에는 해초털털이가 포함돼 있다. 해초털털이는 해녀들이 반찬으로 먹던 것으로 반상의 스토리텔링에 주요한 역할을 한다.
‘쌀’은 황금예찬을 주재료로 한 아이스크림이다. 누룽지와 누룩 소금도 넣어 맛의 균형을 잡았다. 아이스크림 위에는 흰색 가루가 뿌려져 있는데, 한입거리에 사용되는 증편을 건조해 곱게 간 것이다. 눈이 귀한 부산에 겨울의 느낌을 주고 싶어서 낸 아이디어다. 설명을 듣고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니, 눈 밟는 소리가 입안에서 나는 것 같다.
이 외에도 배 속을 파내고 낙지·연근·밤 등을 담아 통으로 찐 ‘해물배숙’, 따뜻한 차와 세 가지 다과를 맛보는 ‘다과’ 등 모든 음식이 오감을 깨운다.
소중한 사람과 나누고 싶은 미식 경험
시그니처 코스가 진행되는 약 3시간은 오로지 먹는 행위에 집중하게 된다. 식재료 하나하나를 온전히 음미한다. 익숙한 식재료마저 색다르게 다가온다. 새삼 이토록 중요한 먹는 일을 그동안 너무 무심하게 대한 건 아닐까 돌이켜본다. 입안에 맴도는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맛을 잘 전하고 싶은데, 표현력의 한계가 아쉬울 따름이다. 소중한 사람과 다시 한번 이 경험을 나누고 싶다.
“미식을 경험하는 일은 평생 추억으로 남아요. 음식을 맛보는 감동은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거든요. 엠비언스를 잘 꾸려나가고 싶어요. 많은 분이 이곳을 경험하시길 바라요.”
엄 셰프의 이야기에 한식 파인 다이닝에 열광하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깨닫는다. 오직 이곳에 와야만 먹을 수 있는 맛, 음식 뒤에 숨겨져 있던 스토리와 셰프의 철학을 만나는 일, 음식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는 것까지.
글 허연선 기자 I 사진 고승범(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