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전원의 꿈 일구는 생활정보지 월간 ‘전원생활’ 3월호 기사입니다.
다 같지 않다. 다 다르다. 콧구멍에 와 닿는 향이 다르고 어금니에 부딪혀오는 식감이 다르고 혀끝을 감아내는 맛도 다르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겉모양만으로 다 같다고 섣부르게 판단하면 안 된다. 밥 이야기다. 한식이 미식의 반열에 오르는 동안 한식의 기본인 밥이, 밥의 재료인 쌀이, 자신만의 스토리와 개성을 가진 온전한 식재료로 변신했다. 한식 파인 다이닝이 찾아낸 마지막 퍼즐, 한국의 쌀이다.
파인 다이닝에서는 한식을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코스 요리 형식으로 낸다. 밥은 대개 코스의 마지막 즈음에 모습을 드러낸다. 주인공인 셈이다. 셰프들이 그냥 아무 쌀이 아닌 특정한 쌀을 골라 밥을 짓는 이유다. 찰기가 짱짱한 쌀, 향이 좋은 쌀, 단맛이 풍부한 쌀, 그리고 이야기가 있는 쌀. 각 다이닝의 개성을 표현하고 식재료의 특성을 잘 아우를 쌀을 선택한다.
부산의 한식 파인 다이닝 ‘엠비언스’에서는 부산에서 나는 쌀 ‘황금예찬’으로 밥을 짓는다. 가능하면 지역에서 나는 제철 식재료를 사용한다는 원칙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맛과 향, 식감 모두 파인 다이닝에 어울릴 만큼 뛰어나 선택했다는 것이 엄현주 셰프의 설명이다.
지역민이 함께 만들어낸 쌀
황금예찬은 부산 서부 지역에 펼쳐진 광활한 김해평야에서 생산된다. 김해평야는 원래 이름 그대로 경남 김해에 속했었지만 부산시 관할 구역이 확장되면서 지금은 부산 강서구와 평야를 나눠 가지게 됐다. 그 유명한 대저 짭짤이 토마토가 생산되는 대저동, 겨울 대파로 이름 높았던 명지동이 부산 쪽 김해평야에 속한다.
영남지역에서 가장 넓은 평야인 김해평야에서는 농부들이 대대로 쌀농사를 지어왔다. 추수가 끝나면 배들이 낙동강을 타고 육지 깊숙한 곳 경북 안동까지 쌀을 실어 날랐다. 식량이 얼마나 풍부했던지 식만동이라는 이름의 지역도 생겼다. 먹을 식(食), 찰 만(滿), 식만동이다. 하지만 토마토 같은 원예작물에서 얻는 소득이 더 커지면서 평야 곳곳에 시설하우스가 들어섰고 도시화로 농지까지 감소하자 논은 급격하게 줄었다.
이곳에서 대대로 쌀농사를 짓고 있는 장원철 씨(51)는 말한다.
“사람들이 대도시 부산, 바닷가 부산에서 무슨 쌀이 나느냐고 되물어요. 아버지는 물론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이곳에서 논농사를 짓고 있는데 말이죠.”
쌀 소비량도 해마다 감소하는 마당이었다. 이렇게 부산의 쌀농사는 저무나 보다 생각했다. 상황을 역전시킨 건 새로 개발된 품종 황금예찬이었다.
시작은 지역에 적합한, 지역을 대표하는 품종을 개발하자는 것이었다. 그동안 부산 김해평야에서는 여러 외래 품종이 섞여서 재배되고 있었다. 이름난 품종을 알음알음 구해 지었고, 찰벼와 매벼를 한 논에 심어 혼종을 만들기도 했다. 밥맛 좋은 쌀을 생산하기 위해 농민들 각자가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하지만 ‘부산 쌀’이라는 통일된 이미지, 잘 관리되는 명품 쌀 브랜드로 인식되기엔 부족했다.
이에 부산시농업기술센터가 국립식량과학원 남부작물부와 협력해 새 품종을 개발했다. 기준은 명확했다. 밥맛이 좋을 것. 차진 밥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의 입맛에 맞춰 찰기가 있되 끈적할 만큼 과하지 않고, 단백질 함량을 낮춰 밥맛을 좋게 하되 배아 잔존율이 높아 영양 성분이 우수한 품종, 바로 황금예찬이었다.
쌀, 이름을 얻다
새 품종 보급에는 부산시농업기술센터와 농민들이 힘을 합했다. 판매는 가락농협이 맡아 100% 계약재배로 황금예찬을 유통한다. 가락농협은 부산에서 유일하게 미곡종합처리장을 운영하는 농협이다. 홍보에 지방자치단체까지 나서면서 지역 관계자 모두가 부산을 대표하는 쌀 만들기에 함께 했다. 농민들은 수확이 끝난 논바닥에 볏짚을 썰어 넣어 땅심을 키우고 질소질 비료 사용을 줄이며 모내기도 최적의 시점을 기다려서 6월 초에 진행했다. 농산물우수관리(GAP)인증도 받았다.
반응은 전문가들로부터 오기 시작했다. 지역의 유명한 양조장에서 황금예찬으로 막걸리를 담그고 이름 난 식당에서 황금예찬으로 밥을 지어 내기 시작했다. 엠비언스도 그중 하나다. 미슐랭에 선정된 지역의 한 식당 셰프는 황금예찬으로 술을 담가 손님에게 내겠다고도 했다.
엄 셰프는 “그동안 각종 향미며 맛있기로 유명한 쌀을 다 사용해봤는데 결국 황금예찬을 선택했다”면서 “과하지 않은 향은 다른 식재료와 어울림이 좋고 적당히 차진 식감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비단 황금예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역 곳곳에서 자신들만의 특성을 가진 다양한 품종을 개발해 재배하고 있다. 품질을 높이기 위해 모내기 전 토양 관리부터 수확 후 저장과 도정까지 전 과정을 꼼꼼하게 관리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목표는 같다. 밥맛 좋게 하기. 다만 방향은 제각각이다. 향이 좋은 쌀을 생산할지, 단맛이 풍부한 쌀을 생산할지, 식감이 쫄깃한 쌀로 할지, 아니면 특정 영양 성분이 풍부한 쌀로 할지.
각자의 방향이 달라지자 다름을 표현하고 알릴 도구도 필요해졌다. 이름이 생긴 연유다. 사실 이전에도 쌀의 이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리기 위한’ 것이기보다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황금예찬의 공식 품종명은 ‘밀양387호’다. 그런데 쌀 저마다의 특성이 분명해지고, 이를 소비자들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해지면서 ‘불리기 위한’ 이름이 필요해졌다. ‘백진주’ ‘수향미’ ‘영호진미’ ‘신동진’ 등이 그것이다.
미식의 세계에 들어서다
소비자들의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경기미, 이천쌀 등 생산 지역 중심으로 소비되던 쌀이 이제는 품종명으로 소비된다. ‘백진주’를 먹는 사람들은 비싸도 ‘백진주’만 먹는단다. 소비자들이 여러 품종이 혼합된 혼합미와 단일 품종으로 이루어진 상품을 구분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며, 고급 쌀 시장이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다. 마치 카페에서 돈을 더 주고라도 싱글 오리진 원두(한 지역에서 생산된 단일 품종 원두) 커피를 선택하는 소비자들이 적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황금예찬은 ‘없어서 못 파는’ 쌀이다. 최근 유행한 ‘두쫀쿠(두바이쫀득쿠키)’ 같은 인기 디저트에서나 벌어지는 일이 쌀에서도 벌어진 것이다.
농부 장씨는 “내가 생산한 쌀이 이렇게 주목받아본 적은 처음”이라고 놀라워했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생산량이 적어서지만 그만큼 쌀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는 증표기도 하다. 소비자들이 고급 쌀을 선택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어느새 쌀이 미(美)식의 세계로 들어섰다.
글 이상희 기자 I 사진 고승범(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