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맛의 고장’ 하면 전라도가 먼저 거론되는 데 큰 이견은 없어보인다. 호남평야를 끼고 있어 벼농사가 활발한 점, 산과 바다가 모두 가까운 점, 상업 중심지로 각종 식재료를 구하기 쉽다는 점은 전라도의 음식문화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전주 출신 소설가 최명희는 대하소설 ‘혼불’에서 고향의 음식문화를 마치 풍속화를 그리듯 세밀하게 묘사했다. 주인공 효원을 포함한 매안 이씨 종부 3대는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으며 사라져가던 양반가의 기품과 자부심을 지켜내려 했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의식주 문화다.
최 작가는 발로 뛰며 얻어낸 방대한 자료를 시처럼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냈다. 작품 곳곳에 나오는 음식 묘사를 읽다보면 단순히 군침이 도는 것을 넘어 눈앞에서 호화로운 12첩 반상을 대접받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수없이 많은 음식 중 하나를 콕 집어 소개하기란 쉽지 않지만 한식의 대표주자인 비빔밥의 숨은 조연, 청포 이야기가 특히 인상적이다.
‘혼불’에는 전주의 물이 특별해서 콩나물이나 청포묵에 신비한 조화가 일어난다는 대목이 나온다. 특히 오목대 아래 자만동 물로 청포묵을 만들면 먹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노란빛을 띤 묵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오목대는 고려말 이성계가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가는 길에 승리를 자축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이성계의 조상인 목조가 살았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 주민은 오목대에서 흘러나온 샘물로 청포묵을 만들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묵샘골’이라고 불렸다. 물맛이 뛰어나 간하지 않아도 묵의 맛이 좋았고, 지금도 오목대 황포묵은 ‘완산팔미(전주 일대의 특미)’ 중 하나로 꼽힌다. ‘혼불’ 속 묘사에 따르면 샘물만으로 은은한 노란색이 난다고 하는데, 원래는 묵을 쑬 때 치자물을 사용해 색을 낸다.
부드럽고 탱글탱글한 식감의 묵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즐겨 먹는 식품이다. 서양의 젤리와는 달리 디저트보다는 메인 요리에 자주 쓴다. 녹말 성분이 포함된 재료라면 거의 대부분 묵으로 만들 수 있는데 청포묵은 곱게 간 녹두가루를 사용한다. 한방에서 녹두는 해독 성분으로 알려졌고 열을 내리는 데 특히 효과가 있다.
중국 남방지역에서는 여름 더위를 이기기 위해 녹두로 탕이나 음료를 만들어 시원하게 마신다. 우리나라에도 조선시대 녹두 녹말을 면처럼 만든 후 화채에 넣어 먹었다. 이를 꽃으로 만든 국수라는 뜻의 ‘화면’ 혹은 ‘책면’이라고 불렀다. 연분홍 오미자 국물에 반투명한 녹두면, 진달래꽃, 앵두 같은 제철 과일로 호화로움을 더한 전통 음료다.
청포묵으로 만든 음식 중 대표적인 것은 ‘탕평채’다. 이는 영조 임금이 붕당의 대립을 막고 균형을 꾀하려 한 탕평책과 맞물려 유명해졌다. 흰 청포묵과 노란 지단, 붉은 쇠고기, 녹색 미나리, 검은색 김(당시에는 표고버섯)이 조화를 이룬 탕평채는 영조가 전달하려던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다.
도토리묵과 달리 청포묵의 풍미는 도드라지지 않는다. 쌉쌀한 도토리묵에 비해 다른 재료와의 조화가 쉽고, 가늘게 썰면 각종 채 요리에 당면 대신 사용하기 좋다. 전주비빔밥의 전통 요리법에는 노란색을 띤 황포묵이 반드시 들어간다. 황포묵은 일반 청포묵보다 시각적으로 호화스럽고 치자의 해열·소염 효과가 더해져 약선음식 재료로 가치가 높다.
정세진 맛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