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인근에서 열린 ‘농협 자율성 수호 농민 결의대회’에 모인 2만여농민은 “농협의 주인이 조합원이라면서, 주인 의견을 마지막까지 듣지 않는 것이 올바른 개혁이냐”며 울분을 쏟아냈다. 임원 개인의 일탈과 의혹을 지렛대 삼아 농협 전체를 비리 집단으로 매도한 뒤, 정부와 특정 농민단체의 의견만 반영해 ‘톱다운’ 식으로 밀어붙이는 개혁을 질타하고 나선 것이다.
이날 농민조합원들의 지적은 관 주도 개혁의 ‘비민주성’에 집중됐다. 헌법과 ‘농협법’이 각각 ‘농어민 자조조직의 자율적 활동 보장’과 ‘국가는 조합등과 중앙회의 자율성을 침해하여서는 안된다’고 명시하고 있음에도 현재 추진되는 절차와 내용들이 이같은 원칙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농협은 올 1∼3월 농림축산식품부 감사와 범정부 합동감사를 연이어 받았다. 같은 기간 농식품부는 민관이 참여하는 농협개혁추진단을 가동해 개혁안을 만들었다. 주요 내용은 농협중앙회장 조합원 직선제 도입과 범농협 독립감사기구 설립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농협 구성원의 의견은 한번도 청취하지 않았고, 개혁추진단의 구체적인 논의와 의사결정 과정도 공개하지 않는 ‘깜깜이’ 방식으로 일관해 반발이 확산하고 있다.
이주한 ‘농협법 개정 대응 비상대책위원회’ 공동비대위원장(강원 평창 진부농협 조합장)은 “농번기에 농민들이 결의대회에 참여한 것은 당정이 농민 의견수렴 한번 없이 6월 지방선거 전에 ‘농협법 개정안’을 졸속 통과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농식품부는 22일과 24일 농협 구성원 등이 참여하는 농협개혁방안 권역별 간담회를 부랴부랴 마련했지만 논의 내용은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28일 국회 상임위원회 법안소위를 앞두고 의견수렴을 했다는 ‘요식행위’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실제 국회와 관가의 주요 관계자들은 “(당정이 추진하는) 그대로 처리될 것”이란 입장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농민들을 서울로 이끈 또 다른 핵심 사안은 조합원 직선제다. 조합원 참정권을 넓히는 것 같지만, 외부 인사가 농협중앙회장에 출마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개선을 위한 개혁인지 개입을 위한 개혁인지 의구심을 키우는 요소가 곳곳에 보여서다.
박경식 공동비대위원장(경기 안산농협 조합장)은 “조합원 직선제를 얘기하면서 농민 아닌 비조합원 외부인사가 농협의 수장이 될 수 있도록 길을 열겠다고 하고, 선거에 들어갈 수백억원은 농협이 부담하라 한다”며 “농협의 정체성을 흔들고 돈 선거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이지만, 현장 우려는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여기에 막대한 선거비용과 전국적인 조직력 등을 감안할 때 “외부 세력이 농협에 진출하려는 의도”라는 일침도 현장에서 나왔다.
‘조합장·조합원’ 편 가르기 시도를 질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경북에서 온 40대 청년조합원은 “언론에서 농협이 마치 조합장의 것처럼 비치고 있지만, 실제 농촌에선 표를 쥔 조합원이 가장 만만하게 각종 지원을 요구하는 상대가 조합장”이라며 현장에 기반한 개혁을 요구했다.
외부 독립 감사기구 설립, 정부 감독권 확대는 농협의 살을 깎아먹고 관치조직으로 전락시킬 것이라는 목소리도 컸다.
경기지역에서 벼를 재배하는 한 농민은 “농민들한테 농협을 돌려준다면서 권한이 막강한 옥상옥 독립 감사위를 둔다는 건 말이 안 맞는다”며 “협동조합 자율성 침해도 문제지만, 연간 수백억원 들어가는 감사위 운영 비용도 다 농민들한테 돌아올 돈”이라고 지적했다.
김해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