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처분 이후 적막만이 흐르는 농장을 바라보며 느낀 것은 재산을 잃은 슬픔보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다시 돼지를 키우고 싶다는 간절함뿐이었습니다. 농가가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십시오.”
“사료와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발생의 인과관계가 확인되는 대로 적극적으로 보상에 나서겠습니다.”
13일 서울 서초구 제2축산회관에서 열린 ‘ASF 피해농가 간담회’. 올해 ASF 발생에 따라 피해를 본 양돈농가 20여곳이 울분을 토해냈다. 정부는 ASF 발생이 농가 귀책이 아닌 특수 상황이라는 점에 무게를 두고 전향적인 지원책을 마련하겠다는 뜻을 공식화했다.
◆역대 최다 ASF…40농가, 17만977마리 땅에 묻어=올초 석달간 전국을 휩쓴 ASF는 많은 것을 남겼다. 우선 양돈산업엔 큰 생채기가 패었다. 대한한돈협회에 따르면 올해 1월16일부터 3월16일까지 전국 돼지농장 24곳에서 ASF가 발생했다.
2019년 9월 국내 첫 발생한 ASF는 지난해까지 55곳이 발생했는데 연간 최대 발생건수를 올해 갈아치웠다. 두달간 살처분된 돼지는 17만977마리에 이른다. 예방적 살처분 농가 16곳을 포함하면 모두 40농가가 돼지를 묻어야 했다.
사태의 주요 원인이 혈장단백 사료로 모인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방역당국 조사 결과, 올해 발생농가 24곳 중 21곳에서 ASF 바이러스 유전형이 해외에서 유행하는 ‘IGR-Ⅰ형’으로 확인됐다. 또한 2월 혈장단백과 이를 활용한 배합사료에서 잇따라 ASF 바이러스 유전자가 검출됐다. 정부가 해당 사료를 회수·폐기하자 더이상 추가 발생이 없었다.
◆농가, “가해자 아닌 국가 방역체계의 피해자”=농가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ASF 발생으로 돼지 4만마리를 살처분한 전남 영광의 한 농가는 “처음엔 다른 농가에 피해를 끼쳤다는 죄의식으로 굉장히 괴로웠는데 조사 결과를 보니 농가는 도축장 혈액과 사료 관리를 하지 못한 국가 방역체계의 피해자였다”고 목청을 높였다.
경기 화성의 한 농가는 “현행 규정상 재입식을 위해선 슬러지(분뇨 찌꺼기)와 퇴비를 완전히 비워야 하는데 여기에만 1억원가량에 이르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 농가들의 재기를 가로막는다”고 토로했다.
정부의 적극행정도 주문했다. 전남 나주의 한 농가는 “현행법상 한국인 직원을 권고사직하면 일정 기간 외국인 고용이 제한되는데, 농장 경영난으로 내국인 직원을 권고사직한 농가가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농림축산식품부가 고용노동부와 적극적으로 협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기홍 한돈협회장은 “이번 사태는 농가 귀책 사유가 없는 만큼 ▲살처분 보상금 100% 지급 ▲재입식사료시설비 등의 긴급경영안정자금 지원 ▲사료구매자금 상환 연기 ▲벌점체크식 역학조사 개선 ▲조속한 재입식 등 보상을 정부에 강력히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외부 요인으로 ASF 발생한 농가엔 살처분 보상금 100% 지급되도록”=정부는 고개를 숙였다. 김정주 농식품부 구제역방역과장은 “현재 혈장단백 사료 내 바이러스의 병원성 실험이 마무리단계에 있다”며 “결과가 나오는 대로 공식 발표하겠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제 환경검사 참여농가에 대해선 방역수칙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법정 최대 80%를 지급하기로 했다”면서 “ASF 발생이 외부 요인으로 확인된 농가는 보상금을 100%까지 보상하는 방안을 법률 해석과 적극행정을 통해 추진 중인 만큼, 추가 예산을 확보하는 대로 최종 산정액의 50%라도 우선 지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현 농식품부 축산경영과 사무관은 “혈장단백 사료와 ASF 발생의 인과관계가 공식 확인되면 농가의 귀책 사유가 없는 방역정책 피해로 판단해 긴급경영안정자금 지원대상이 된다”며 “농가당 최대 5억원을 1%대 저리로 융자 지원하는 방안을 계획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다만 사료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김재경 농식품부 축산환경과장은 “‘사료관리법’상 전염병에 대한 규정이 없어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 연구를 통해 기준을 세우고 사료 원료의 검사 체계도 구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료구매자금 상환 연장은 재정당국과 협의가 필요하며 다른 축종과의 형평성도 고려해야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김보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