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만 해도 국내 와인 시장은 낮은 인지도와 품질에 대한 불신이라는 높은 벽에 부딪히곤 했다. 그러나 최근 국내 와이너리들은 고품질·다품종 와인 생산으로 그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한국 와인이 이뤄낸 생생한 진화의 모습을 11~14일 충북 영동에서 열린 ‘제15회 대한민국 와인축제’ 현장에서 확인했다.
영동군에 따르면 영동천 하상주차장에서 4일간 개최된 이번 축제의 방문객은 12만명으로, 행사에는 영동 와이너리 23곳과 그밖의 지역 6곳 등 29개 와이너리가 참여해 성황리에 치러졌다. 축제 기간 판매된 와인은 1만9400병, 매출액으론 약 3억9000만원에 달한다.
‘미르아토’ 와인을 생산하는 전인기 영동와인연구회장은 “국내 와인은 소규모 농가 중심으로 생산되는 경우가 많아 홍보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와인축제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우리 와인을 알릴 좋은 기회를 얻고 있다”며 “우리 와인은 온라인 구매도 가능한 만큼 많은 관심과 이용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영동은 포도를 비롯해 복숭아, 자두, 감 등 와인의 원료가 되는 과실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다. 충북 영동이 오늘날 한국 와인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은 약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6년 와인코리아의 전신인 ‘영동포도가공영농조합’이 국내 토종 와인을 처음 선보인 것을 시작으로 농가형 와이너리가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후 영동은 와인 산업의 성장과 함께 발전을 거듭하며 국내 최대 와인 생산지로 자리매김했다.
최근 영동 와인 산업은 단순히 와이너리 숫자를 늘리는 ‘양적 성장’에서 벗어나 시장 경쟁력을 갖춘 강소(强小) 와이너리를 육성하는 ‘질적 성장’ 단계로 진입했다. 실제 한때 47곳까지 늘었던 와이너리는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을 거쳐 현재 33곳의 와이너리가 활동하는 구조로 재편됐다. 약 10곳 안팎의 와이너리가 규모화를 추진 중이며 생산 시설의 고도화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6곳은 농림축산식품부의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지정되면서 지역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주목받고 있다.
축제에서 선보인 와인의 개성도 한층 뚜렷해졌다. 과거 한국 와인은 ‘캠벨얼리’ 품종으로 만든 농가 와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캠벨얼리’ 외에도 ‘MBA(머스캣베일리에이)’ ‘델라웨어’ ‘청수’ ‘샤인머스캣’ 등 다양한 품종의 와인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포도에 국한하지 않고 자두, 블루베리, 복숭아 등 다양한 과실을 활용한 와인도 잇따라 시장에 나오고 있다. 와인을 증류해 만든 고품질 증류주(브랜디)를 출시하는 양조장이 눈에 띄게 늘었다.
안남락 도란원 대표는 “산머루와 캠벨얼리, 샤인머스캣뿐 아니라 자두와 사과 등 다양한 과실로 와인을 만들고 있다”며 “우리 땅에서 자란 농산물로 빚어낸 와인을 통해 한국 와인만의 정체성과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와인의 판매 형식도 변화하고 있다. 이날 축제도 한국 와인과 안주를 함께 즐기는 페어링 행사가 열렸다. 과거 단순 시음과 판매 중심에 머물렀던 양조장들도 이제 팜파티, 음악회, 미술 공연 등을 접목하며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하는 데 발을 맞추는 것이다. 현대의 소비자들은 단순히 술을 구매하는 행위를 넘어 와인이 생산되는 농촌의 풍경과 문화를 함께 소비하고 경험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매년 10만명 안팎의 관광객이 찾는 대한민국 와인축제는 지역 농가의 소득 증대는 물론, 인구 소멸 위기를 겪는 지역의 관광 활성화에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영동역과 축제장을 수시로 오가는 무료 택시를 운행하는 등 방문객들의 접근성과 편의성을 높이는 세심한 기획이 돋보였다.
이민 영동군농업기술센터 와인산업팀장은 “외국 와인을 그대로 모방하기보다는 K-와인만이 가질 수 있는 독창성을 유지하며 마니아층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며 “와이너리마다 자신들만의 테루아(Terroir·생산 환경)와 개성을 담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영동=박준하 기자(전통주 소믈리에) june@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