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이나 배추 같은 식자재에서 원래 모습을 잃을 정도로 변형된 식품인 초가공식품(UPF) 개념과 규제를 두고 학계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가공식품인 감자칩부터 김치 등 발효식품까지 기준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과학 전문 매체 ‘사이언스’ 지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이미 초가공식품에 칼을 빼 들었다. 이달 5월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1억5000만달러(약 2242억원) 규모의 아동 식단 연구 사업을 승인했고, 식품의약국(FDA)은 지난해부터 초가공식품의 법적 정의를 마련하는 일에 착수 중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개념부터 다시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초가공식품은 브라질 상파울루대학교 영양학과의 카를로스 아우구스투 몬테이루 교수가 2009년 고안한 ‘NOVA’ 분류 체계에서 비롯됐다. 그는 가정이나 식당 주방에서는 볼 수 없는 유화제, 합성향료, 단백질 분리물, 변성전분 등 산업용 성분이 포함된 식품을 초가공식품으로 분류한다. 탄산음료, 감자칩, 시리얼, 첨가당 요거트, 단백질 파우더 등이 대표적이다. 몬테이루 교수는 “미국인이 섭취하는 열량의 절반 이상이 이 범주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영양 성분 같아도 더 먹게 된다
그렇다면 초가공식품은 왜 문제일까. 미 국립 당뇨·소화·신장질환연구소(NIDDK) 케빈 홀 박사팀은 2019년 생화학 분야 학술지 ‘셀 메타볼리즘(Cell Metabolism)’에 발표한 무작위 대조 임상시험에서 이를 확인했다.
연구팀이 총 칼로리와 당류·나트륨·지방·식이섬유 함량을 동일하게 맞춘 두 식단을 비교한 결과, 초가공식품 식단 참가자들은 최소가공식품 식단 참가자보다 하루 평균 508㎉를 더 먹고 체중도 더 늘었다. 뇌의 보상 체계를 자극해 실제보다 더 맛있게 느끼게 만드는 초가공식품의 특징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뇌 건강까지 위협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하버드대학교 보건대학원 영양학과 신디 렁 교수팀이 올해 6월 미국 공중보건 저널(AJPH)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초가공식품을 가장 많이 섭취한 집단은 가장 적게 먹은 집단보다 치매 발생 위험이 58%, 인지장애 위험이 46% 높았다.
“범주 너무 넓고 영양구성 무시” 반론도
비판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미국 예일대학교 보건대학원 수전 메인 교수(전 FDA 식품안전영양센터장)는 “이 기준은 식품의 영양 구성을 무시한다”며 “수십년간 축적된 영양 성분 연구를 외면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11일 사이언스지를 통해 지적했다.
덴마크 코펜하겐대학교 영양·운동·스포츠학과의 파이돈 마그코스 교수도 같은 매체를 통해 “국가 정책 초점은 초가공식품 적합 여부보다 식품이 영양적으로 빈약하고 칼로리 밀도가 높은지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밀빵이나 통밀 파스타 등 영양가 있는 식품도 반죽에 효소나 방부제가 들어가면 초가공식품으로 분류되는 것이 그가 꼽는 대표적인 문제 사례다.
된장·김치·떡도? 영양적 특성 기준 필요
국내에는 아직 초가공식품에 대한 정부의 공식 정의나 분류 기준이 없다. 다만 서울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이서현 연구원이 올 2월 발표한 석사학위논문에 따르면, 한국인이 섭취하는 식품 2665개를 NOVA 기준으로 분류한 결과 360개(13.5%)는 초가공식품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운 ‘불확실 식품’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떡·김치·장류·절임류 등 한국 전통식품이 43.6%를 차지했다.
또 기준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한국 성인의 초가공식품 에너지 섭취 비율은 최소 21.5%에서 최대 38.1%까지 벌어졌다. 된장·고추장·김치·간장 같은 전통 발효식품도 분류 기준에 따라 초가공식품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서현 연구원은 초가공식품 섭취 감소를 위한 정책적 접근에서 일률적인 배제보다 개별 식품의 영양적 특성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용어 설명] 초가공식품(UPF·Ultra-Processed Food)
브라질 상파울루대학교 연구팀이 개발한 NOVA 분류 체계에서 가장 높은 가공 단계인 4군에 해당한다. 영양 성분이 아닌 제조 공정과 원료의 성격으로 판별하는 것이 특징이다. 세계보건기구(WHO)·유엔식량농업기구(FAO) 같은 국제기구도 식생활 평가 지표로 활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휘빈 기자 vinyvin@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