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농촌 현실은 ‘보릿고개’로 상징되듯 매우 암담하고 처참했다. 호당 평균 경지면적이 0.88ha였으며, 농가의 41%는 0.5ha 이하였다. 평균 농가소득은 약 5만6000원이었고, 이 중 농업소득은 4만원 정도였다. 농업소득으로 가계비를 충당할 수 있는 농가는 30%밖에 되지 않았으며, 농외소득을 포함해도 농가인구의 절반은 가계비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궁핍한 생활이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민심 수습과 자립경제 재건을 목표로 같은 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에서 농업정책은 농업생산력 증대를 통한 농가소득 향상을 핵심 목표로 설정했으며, 1960년 1595만석 수준의 생산량을 1966년 2056만 7000석까지 확대할 것을 선언하며 특히 미곡 증산을 강조했다.
정부는 먼저 농촌 빈곤과 사회문제화되고 있는 고리채 정리를 위해 1961년 6월 9일 ‘농어촌 고리채 정비법’을 공포하여 농촌의 고리채 부담을 완화하고자 했으며, 6월 27일에는 ‘농산물가격유지법’을 제정·시행하여 ‘미곡담보융자제’, ‘정부매상제’를 도입, 농산물 가격 안정을 제도화했다. 이어 8월 15일에는 농업은행을 통합하여 ‘농업협동조합’을 발족시키는 등 금융과 유통을 포함한 농촌경제 전반의 정리를 추진했다.
1962년에는 농업 구조개선에 관한 연구·심의를 위해 ‘농업구조개선심의회’를 설치했다. 농지의 소작금지를 헌법에 명시했으며, ‘농촌진흥청’을 설립하여 연구·지도·보급사업을 전담하게 했다. 곡물 생산 증대를 위해 1963년 동력경운기 300여대를 국고지원 50%, 농협융자 20%, 자부담 30%로 보급했다. 1964년에는 경지정리사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했다.
농어촌 고리채 정리는 1961년 5월 25일 이전의 채무 중 연리 20%를 고리채로 간주하고, 세대당 원금 1만5000원 한도로 신고를 받았다. 고리채로 판정된 부채는 농협중앙회가 발행한 농업금융채권을 교부했다. 농업금융채권은 연리 20%로, 12%는 채무자가 정부에서 융자를 받아 부담하고 정부가 8%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1년 거치 4년 분할 상환이었다.
총 52억원이 신고됐고, 이 중 24억9300만원이 혜택을 봤다. 당시 사채 이자가 60%였고 쌀 한 가마 가격이 약 1800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획기적인 조치였음에도, 신고액이 농어가부채 총액 231억원(추정치)에 비해 극히 적었다. 불충분한 재정 투입과 관리 미흡으로 이후 농가부채는 더욱 늘어나 농업 발전을 저해하는 이슈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중농정책은 시행 초기부터 구조적 한계에 직면했다. 국가 재정과 역량이 공업화에 집중되면서 농업 부문에 대한 투자는 제한적이었다. 1960년대 초 농업은 전체 취업인구의 80%를 고용하고 총 GDP의 45%를 차지하고 있었다.
농가인구가 약 150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50%를 웃돌았음에도 농업예산은 총예산의 약 13%에 불과했고 이 중 25%는 식량 수입예산으로 사용돼 실질적인 농업 발전에 사용된 예산은 미미했다. 이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중농정책으로 농가소득 향상을 표명했지만, 농업은 산업화를 지원하는 후방 역할이 강조되면서 나타난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한편, 재해 악화로 인한 생산 감소까지 겹치면서 식량 수급 불안이 더욱 심화했다. 그 결과 1963년에는 쌀 50만톤을 포함해 밀과 보리를 합쳐 총 100만톤에 이르는 외국산 곡물이 수입됐다. 이 과정에서 ‘농산물가격유지법’은 농가소득을 보장하는 장치가 아니라 도시 물가 안정을 위한 저곡가 정책의 근거로 작용하게 됐고, 농민들은 낮은 가격구조 속에서 경제적 부담을 떠안게 됐다.
저곡가 정책으로 인해 농가소득은 최저 생계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됐고, 이에 따라 약 100만명에 달하는 영세농민들이 농촌을 떠나는 대규모 이농 현상이 발생했다. 또한 농가 경제는 농기계와 영농자재 구입 부담까지 더해져 더욱 악화했다.
제3차 농업증산 5개년 계획 수립
농촌의 어려움은 1966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종료 시점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전체 산업은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으나 농업은 상대적으로 낮은 5.3% 성장에 머물렀고,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1차 산업의 비중은 1961년 약 40%에서 1966년 약 31%로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농가소득은 1인당 월 1500원 수준으로 도시 노동자의 월 4500원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이는 농업이 산업화의 기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그 성과를 충분히 공유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정부는 부족한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1962년 ‘제3차 농업증산 5개년 계획(1962~1966)’을 수립하고, 이어 1965년 ‘식량자급 7개년 계획(1965~1971)’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자급자족 달성을 목표로 하고, 식량 소비구조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증산정책을 추진했다.
핵심 추진 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증산을 막는 제도·재정상의 장애 제거 ② 증산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 확보 ③ 행정추진체계 정비·강화 ④ 농민의 자발적 생산의욕 고취 ⑤ 농산물 가격 안정 보장 ⑥ 농협·토지개량조합 중심의 생산조직 육성 ⑦ 농업금융 투자 확대 ⑧ 단위 면적당 생산성 향상 ⑨ 개간을 통한 경지면적 확대이다.
이 계획에 따라 농가 평균 경지면적은 0.87ha에서 1ha로 확대되고, 곡물 생산량은 증가하며, 농산물 가공을 통한 외화 획득과 농가소득 20% 증가가 기대됐다.
농가소득 하락·곡물 수입 급증
1967년에는 ‘농업기본법’을 제정하여 농업 근대화, 생산성 향상, 농가소득 증대, 농업구조 개선을 국가의 책무로 명문화했다. 또한 1968년부터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을 추진하여 과수, 채소, 특용작물, 축산 등 고소득 작목 확대와 지역 특화작목 육성을 장려하고, 저리 정책자금 공급과 농협을 통한 유통 지원을 병행했다.
1967년에는 재해 피해 보상을 위해 ‘재해대책법’, ‘경지조성법’, ‘풍수해대책법’을 제정했으며, 1969년에는 ‘양곡관리특별회계’를 설치하여 ‘이중곡가제’를 실시했다. 또한 부족한 곡물 소비를 줄이기 위해 ‘절미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1967~1971년 동안 곡물 생산량은 감소하고, 농가소득은 도시 노동자의 60% 수준으로 하락했다. 곡물 수입은 1965년 47만톤에서 1970년 211만톤으로 급증했고, 식량자급률은 1966년 94.7%에서 1971년 69.4%로 크게 하락했다. 농업종사 인구도 감소했다. 특히 미곡가격 정책은 생산비 보장을 명분으로 했으나 실제로는 낮은 수준에서 결정됐고, 식량작물 이외 작물에 대한 정책 미흡은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떨어뜨렸다.
결과적으로 1960년대 농업정책은 농가소득 향상을 표방했으나, 공업화 중심 개발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농업의 희생을 전제로 한 구조였다. 이에 따라 약 247만명의 농업인구가 농촌을 떠났고, 농촌의 일손 부족과 임금 상승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1960년대 농촌 현실에 대한 증언
한국 농민운동 태동에 중심 역할을 했던 강원 춘천, 원주 지역 가톨릭농민회 원로회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1960년대 한국농업은 이구동성으로 “처참했다”고 증언한다. 당시 농촌사회에 대한 기억은 장리쌀, 고리대, 굶주림이었다. 비료도 없어서 갈잎을 꺾어 거름으로 사용했으니 생산량은 형편없었다고 이야기한다.
한 마지기에 양석(쌀 1가마)을 수확했으니 일 년에 대여섯 가마밖에 수확하지 못한 농가가 대부분이었다고 이야기한다. 그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이 3000원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한 해 농사를 지어도 먹을 양식조차 되지 않아 한 마을에 60~70%는 장리쌀을 먹어야 하는 농가가 대부분이었다.
장리쌀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쌀 한 말을 봄에 빌리나 여름에 빌리나 가을에 한 말 반을 갚아야 했으니 폭리도 대단한 폭리였다고 한다. 대부분 농가는 가난이 무서워 한입이라도 줄이기 위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도시로 나가 식모살이, 공장 생활로 남아 있는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당시 소출도 적고 가격도 형편없어 농사를 짓는 것보다 소를 한 마리 사 품을 파는 것이 더 나았다고 한다. 당시 송아지 한 마리 가격이 3000원으로 쌀 한 가마 가격이었고, 소 한 마리 품삯이 쌀 반 말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전남 보성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문경식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도 같은 증언을 한다.
정책 시행에도 더 많은 농업 문제에 직면
여러 정책을 시행하지만 성과보다는 더 많은 농업 문제에 직면한 정부는 1970년 12월 16일 ‘경제과학심의회의’ 심의를 개최하여 ‘1970년대 농정 기본계획’을 수립한다.
내용은 ① 구조개혁정책으로 농업의 기계화를 위한 토지 기반 조성, 홍수조절이 가능한 농업용수 개발 및 하천 정비 ② 농어촌 문화환경 개선 정책으로 농어촌의 촌락 구조를 기계농업에 적합하도록 개편하고 주택, 전기, 문화 및 위생시설을 대폭 확대하는 것 ③ 생산정책으로는 식량자급정책을 추구하되 육종 및 지도사업을 위한 산학협동체계의 확립, 토지의 최적 이용, 농업 생산자재 공급 방법의 개선, 간척지 개발에 의한 곡물 증산 및 근대적인 양조업의 개발, 축산의 협동화 등을 통해 획기적인 농수산물 증산을 도모하는 것 ④ 유통 및 가격정책으로 적정미가 및 이중가격제에 의한 식량자급의 가격조건을 조성하고, 농수산물 수급의 원활화 및 유통단계 축소를 위한 양곡회사의 설립과 협동조합을 통한 판매사업 확대, 가격 형성의 공정화, 특용작물의 계획생산, 축산물 소비증대 시책, 품질관리 및 검사제도의 합리화를 통해 가격 및 유통구조의 근대화를 도모하는 것 ⑤ 농업금융정책으로는 농업개발금융 재원의 확충과 상호금융제도의 발전을 통해 구매·수매 및 비축자금의 원활한 운용으로 생산 및 유통을 효율적으로 지원하고, 빈번한 풍수해에 대비하는 풍수해 복구 융자제도를 확립하는 것 ⑥ 농민·수산행정 및 관리기구 합리화를 위해 중앙기구를 대폭 축소하고 식산 위주의 기구로부터 가공·유통 및 농업 사회간접자본까지 관장하는 기구로 개편하는 것이다. 농업근대화를 통해 식량자급과 농가소득 증대를 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 간 균형발전을 도모하고자 했다.
1967년 제정된 ‘농업기본법’과 1970년에 제정된 ‘농촌근대화촉진법’, ‘식량자급 7개년 계획’에 기본계획을 반영하여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2~1976)을 수립했다. 신품종 ‘통일벼’를 공급하고 농기계 보급과 비료·농약 사용을 확대하여 농업생산성을 높이는 한편 정부 수매를 강화해 소득을 안정화하고자 했다. 또한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촌 도로와 주택을 정비하여 근대화를 추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