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현채 선생은 ‘한국 농업의 구상’에서 농민의 입장에서 경제정책을 바라볼 때, 한 나라의 경제정책이 어떠한 논리에 의해 결정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농정사를 농민 입장에서 기록하는 것은 농민이 농정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라는 관점을 정립하는 측면에서 매우 소중한 일이다.
그동안 농업정책에 대한 연구는 적지 않게 이뤄져 왔지만, 대부분은 정부나 학자의 시각에서 분석된 것이었다. 정작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농민은 주변화됐고, 정책의 주체가 아니라 수혜의 대상으로만 간주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농업정책은 농민의 삶의 조건과 농업 구조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이며, 그 영향은 단순한 경제 영역을 넘어 농촌 사회 전반에 깊게 미친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역대 정부가 추진해 온 농업정책이 농민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줬는지 농민의 시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동시에 각 시기마다 농민들이 정책에 어떻게 대응하고 어떤 방식으로 대안을 모색해 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단순한 과거 정리가 아니라 앞으로 농업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농민들에게 농업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가능성을 제시하는 데 의미를 가진다. 요즘 농업문제의 핵심 이슈로 등장하고 있는 농지정책에 대해서는 글을 쓰는 중간에 별도로 다루려고 한다.
“농민 시각으로 역대 정부의 농정 살필 것”
본 글은 1960년대부터 시작한다. 이는 해방 이후 5.16 군사정변 이전까지는 농민들의 조직적 대응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고, 농업정책 또한 산업정책으로서 체계적인 정립이 미흡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는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농업정책도 보다 체계적이고 제도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시기라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기술 방법은 각 시기별 정부의 농업정책을 중심으로 내용을 정리하고, 동시에 농촌 현장에서의 실제 경험과 농민들과의 대담을 통해 정책이 어떻게 수용되며 변화됐는지를 함께 서술하는 방식으로 구성한다.
농정사를 시기별로 구분하는 작업은 간단하지 않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발간한 ‘한국농정 50년사’에서도 지적하듯이 한국의 농정은 충분한 사회적 논의나 제도적 안정성 위에서 형성되기보다는 정책결정자의 의지에 따라 급격하게 변화하거나, 때로는 후속 정권에 의해 쉽게 수정·번복되는 특성을 보여 왔다. 이러한 점은 농정의 일관성을 약화시키고 농민들에게 지속적인 불신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1960년대부터 네 시기로 분석한 한국 농정 70년
본 글에서는 분석을 위해 한국 농정의 흐름을 네 시기로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
1기(1961~1979년)는 ‘개발독재 시기의 농정’으로 국가 주도의 산업화 과정 속에서 농업이 희생되거나 종속된 구조를 보였던 시기이다. 이 시기 중요 농업정책은 ‘식량 증산’과 ‘농업 근대화’였다. 만성적인 식량 부족으로 기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식량문제 해결이 농업정책의 핵심이었다. 군사정변으로 들어선 정부로서는 국민들을 궁핍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에도 중요했다.
군사정부가 들어서고 첫 번째로 추진한 농업정책 1호가 ‘농어촌 고리채 정리사업’이었다. 장리쌀로 알려진 고리대는 춘궁기에 쌀 한 말을 빌리면 가을에 한 말 반을 갚아야 하는 구조였다. 가을에 장리쌀을 갚고 나면 다음 해 봄에 다시 빌려야 하는 악순환으로 농민들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어 추진한 정책이 곡물 증산 운동과 정부가 농산물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위한 ‘쌀 매입제’였다. 농지 확보를 위한 개간사업, 한해 대책을 위한 양수기 보급, 기계화를 통한 생산력 증대 목적의 경운기 보급 등 증산 운동이 강력하게 추진됐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곡 자급’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통일벼라고 통칭되는 신품종 종자 보급을 늘렸으며 ‘이중 곡가제’를 시행하여 다수확을 통한 농가소득 증대 방안이 제시됐다. ‘증산왕 시상’과 시상 농민을 청와대에 초청하는 등 증산 의욕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시책도 추진됐다.
4차례에 걸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산업 근대화와 농업 발전을 위한 다양한 농업정책을 추진하고 실행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주곡 자급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쌀 생산에 몰입했지만, 이마저도 1978년 한 해를 제외하고는 실패한다. 오히려 식량 수입은 늘어나고 이농이 확대되면서 농가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게 됐다.
2기(1980~1993년)는 개방농정 시기로 농산물 시장 개방 압력이 본격화되면서 국가 주도 식량 증산 중심에서 시장·구조 개편 중심으로 전환이 시도됐던 시기이다. 1970년대 농정의 중심이었던 미곡 증산을 통한 농가소득 증대에서 10대 소득 작목 선정과 통합 복합영농이 추진되는 등 농정의 핵심이 개방화를 전제로 한 농업 재편기였다. 이 시기의 핵심 논리는 ‘비교우위’와 농외 소득 확대를 통한 농가소득 증진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산물 수입은 더욱 노골화됐다. 국제 경쟁력 강화를 통한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값싼 외국 농산물을 들여와 국내 물가를 안정시키면서 저가격 저임금을 통해 제조 단가를 낮춰야 한다는 비교우위론이 전면에 등장한다. 미국의 농산물 통상압력에 1988년 한·미 통상협상이 타결되면서 일명 ‘4.8 농축산물 수입 자유화 조치’를 발표한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243개의 농축산물 품목에 대해 완전 수입 자유화를 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수입개방으로 농업이 위기에 처하자 정부는 농가소득을 높이기 위해 ‘복합영농’을 전면적으로 확대 추진한다. 전략 품목을 선정하고 축산을 장려하면서 소 입식 사업을 전개한다. 그 유명한 ‘전경환 소’가 등장하는 배경이다. 소 입식 장려로 국내 소가 부족해지자 육우 송아지를 대대적으로 수입하면서 사육 두수가 급등하게 되고 가격은 곤두박질친다.
거듭된 정책 실패 이후 정부는 1986년 3월 5일 ‘농어촌 종합대책’을 발표한다. 뒤이어 ‘농어가 부채 경감 대책’을 추진한다. 낮은 경작 면적 확대를 위해 1986년 ‘농지 임대차 관리법’을 제정하여 임대차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1988년에는 농지 규모 확대를 위해 농협을 통해 장기 저리 융자로 농지 구입 자금을 지원한다.
그러나 농축산물 수입 자유화 선언의 파장은 컸다. 복합영농으로 생산을 확대한 고추, 우유, 엽연초, 소, 돼지 등 국내 농축산물 가격이 계속 하락하면서 전국 농민들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1989년 2.13 여의도 전국농민대회를 기점으로 개방농정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 속에 1980년대 농업이 막을 내린다.
WTO 출범·신자유주의 정책 심화
3기(1994~2002년)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출범과 함께 농업 시장 개방과 구조조정이 본격화된 시기이다. 시장 개방화에 대응하여 ‘농어촌 발전 종합대책’으로 1992년부터 2001년 10년 동안 42조원의 구조개선 자금이 투입된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 이후 정부 수매 중심의 가격 지지 정책은 축소됐고 농업구조개선이 핵심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정부는 1970·1980년대의 공업 일변도 정책으로 인해 농업 인구 감소와 노령화, 농가소득 정체 등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한다.
일명 ‘신농정’은 개방화를 전제로 한 전면적인 농업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전업농을 확대하고 기계화와 규모화를 통한 시장 경쟁력을 높여 수입 농산물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겠다는 발상이었다. 이를 위해 총 57조원의 투·융자 자금이 투입되지만 열악한 농업 구조를 바꾸지 못한 채 농민들의 저항에 직면한다. 쌀 협상 반대와 UR 국회 비준 반대 범농민적 저항은 ‘6.14 농어촌 발전 종합대책’을 발표하게 한다.
이어 김대중정부는 신농정을 승계하면서 시장 개방 확대, 농가소득 정체, 부채 증가, 농업 인구 고령화 심화에 대응하여 정책을 마련했다. 영세·고령농 중심의 농업 구조를 전업농 중심의 전문 경영체로 전환하기 위해 농지 유동화를 촉진하고 생산자 조직화와 공동 경영을 확대하여 시장 대응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농가소득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직접지불제를 확대하고 친환경·고품질 농업 육성으로 수입 농산물과의 차별성을 높여 부가가치 창출을 목표로 했다.
문민정부와 국민의정부는 시장 개방 확대 속에서 농가소득을 높이기 위한 정책들을 시행했지만 농업 내부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농촌의 고령화와 농업소득의 정체로 이어졌다.
4기(2003년 이후)는 FTA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 속에서 농업의 시장화와 경쟁력이 강조되는 시기이다. WTO 체제의 심화와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 그리고 다수의 FTA 체결이 농정 방향에 큰 영향을 줬다.
이 시기 농정은 가격지지 정책에서 소득 직접지불 중심으로, 양적 증산 중심에서 친환경 농축산물 생산과 안정성·품질 경쟁력 중심으로, 농업정책 중심에서 농촌정책 중심으로 전환됐다. 또한 50년간 유지되던 쌀 수매제는 폐지되고 공공비축제로 전환되면서 농업은 본격적으로 시장경제에 편입됐다.
참여정부는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과 쌀 개방을 앞두고 농업발전과 농민복지 증진을 위해 향후 10년간 119조원 규모의 투·융자 계획을 수립하고, 재원 마련을 위해 농촌특별세 과세를 연장했다. 규모화를 통한 전업농 육성과 농업구조조정을 핵심 정책으로 추진했으나, 쌀 시장까지 개방되면서 모든 농축산물이 외국 농축산물과 무한 경쟁에 놓이게 됐다.
그 결과 농업소득은 정체되고 농가부채는 증가했으며, 식량자급률과 곡물자급률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2003년 이후 농업정책은 정권이 바뀌어도 개방화와 규모화라는 큰 틀을 유지하면서 농민 감소와 농업 축소가 지속됐다.
새 정부마다 농업 발전 정책 내세웠건만…
1960년대 이후 70여년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농업 발전을 위한 정책을 내세웠지만 현재 농업·농촌의 현실은 암울하다. 수십년째 이어오는 1000만원 남짓의 농업소득, 농민 평균연령이 60대 중반이고 200만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농민 인구, 구조조정을 통한 농가규모 확대라는 구호가 무색한 농가 1가구당 1.5ha의 경지면적, 20% 내외의 곡물자급률이라는 현실은 구조적 한계를 보여준다.
이 글을 통해 이 원인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고 농민들은 정책에 대해 생각이 어떠했는지, 또 이후 농민들은 어떠한 농정을 기대하는지를 기록하고자 한다.
※ 이번호부터 ‘농민이 기록하는 농업정책사’를 매달 한 번씩 연재합니다. 농민의 삶과 농업 구조를 규정해 왔던 농업정책의 역사를 농민의 관점에서 새롭게 써내려가는 여정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