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사진 한승호 기자]
국가중요농업유산은 농업·농촌의 미래를 위해 보전할 가치가 있는 각종 유무형 농업자원을 국가가 지정한 것으로, 선조들이 과거부터 이어온 전통 농사 활동 및 농촌 경관, 토지이용체계 등이 지정 대상이다.
우리나라는 2013년부터 국가중요농업유산 지정을 시작했다. 2026년 현재, 우리나라엔 총 20가지의 국가중요농업유산(농업유산)이 존재한다. 본지는 향후 매월 1회씩 국내 농업유산들을 소개하며 선조들이 농사 과정에서 어떤 지혜를 발휘해 왔는지, 농업유산이 오늘날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소개할 농업유산은 제주 밭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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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제주 밭담
제주도 곳곳을 다니다 보면 검은색 현무암을 차곡차곡 쌓아 밭 주변에 둘러쳐 놓은 담장이 흔하게 보인다. 밭 주변에 친 담벼락, 즉 ‘밭담’이다. 밭담은 제주도의 척박한 토양과 기후 속에서 주민들이 어떻게든 농사짓고 살아가고자 분투했던 흔적 그 자체다. 제주도 구석구석에 혈관처럼 뻗어 있는 밭담의 길이는 지구 반 바퀴 길이인 약 2만2000km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바람이 많이 불었다. 1년 중 3분의 1에 달하는 4개월 남짓한 기간에 초속 10m 이상의 폭풍이 불고, 여름엔 초속 40~50m 이상의 태풍이 수시로 들이닥친다. 타 지역 대비 강한 바람에 대비한 농업체계를 구축하는 등의 농사 피해 방지 노력이 불가피했다.
그러한 노력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떠올린 대안은 밭담이었다. 제주도는 바람이 많이 부는 섬이기도 하지만 돌이 많은 섬이기도 하다. 하도 돌이 많다 보니 농사 과정에서 돌을 골라내는 것도 일이었다. 제주도민들은 그 돌을 그냥 치워버릴 바에야 담벼락을 쌓아보자는 데로 생각이 이어졌다. 경작과정에서 골라낸 돌로 담벼락을 쌓아 강한 바람을 막고, 토양유실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밭담의 주 재료는 제주도 곳곳에 널려 있는 현무암이다. 현무암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구멍 숭숭 뚫린 밭담은 강한 바람을 걸러내 부드럽게 만듦으로써 농작물의 쓰러짐을 막아주고, 농경지에 찬바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보온작용도 했으며, 호우로 인한 표토층 유실도 막는 등 다양한 기능을 발휘했다.
밭담은 1차적으론 바람막이용, 표토 유실 방지용으로 쌓았지만, 옆 농가 가축(특히 말과 소)의 농경지 침입을 방지하는 역할 및 농지 경계선 역할도 톡톡히 했다. 따라서 제주도에선 타 지역에 비해 농민 간의 농지 소유권 관련 충돌 가능성도 훨씬 낮았다. 한편 밭담 구축 작업 자체도 개별 농가만이 아닌 이웃 주민과의 협업하에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던 점까지 겹쳐, 밭담은 제주도민들의 굳건한 공동체 의식 형성에도 기여했다.
제주 밭담 보전에 앞장서는 농민 부석희(제주시 구좌읍 평대리)씨는 밭담의 존재 자체가 제주도의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경관의 조성에 크게 기여했으며, 척박한 환경에서도 농사가 이어질 수 있게 만들었다고 그 의미를 평가했다.
10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유지돼 온 밭담의 소멸위기를 초래했던 가장 큰 사건은 제주 4.3이었다. 당시 ‘무장대’를 토벌하려던 군경은 해안가에 무장대 기습 방어용 성을 쌓아 주민들을 성안으로 몰아넣었다. 토벌대는 농사지으러 나갔다가 오후 4시 30분까지 성안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무조건 ‘빨갱이’로 간주해 사살했다(부석희씨 증언).
부석희씨는 “토벌 과정에서 남성들은 대부분 (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하거나 토벌을 피해 (한라산으로) 입산했다. 마을엔 여성과 아이, 어르신만 남았다. 토벌대는 이들에게 성을 쌓으라고 명령했다. 주민들에게 그나마 ‘만만한(그나마 들 수 있는)’ 돌은 밭담에 쌓은 돌이었다. 밭담 돌을 빼서 성을 쌓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증언을 했다.
4.3의 폭풍이 지나간 후 세월이 흐르며, ‘돌챙이 하루방(당시 돌로 성을 쌓았던 할아버지)’들은 4.3 당시 타의로 쌓았던 성벽의 돌을 하나씩, 하나씩 빼갔다. 처음엔 성벽의 돌을 빼는 것도 눈치 봐야 했지만, 이후 점차 많은 돌을 빼서 다시 밭담을 쌓기 시작했다. 역사의 비극 속에서 사라질 뻔했던 밭담은, 그렇게 차츰 제주도민 곁으로 돌아왔다. 부석희씨는 “그렇게 돌아온 밭담이기에 더욱 소중할 수밖에”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