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부터 발행되고 있는 <녹색평론>의 발행인이었던 고 김종철 선생은 2009년에 이런 얘기를 쓴 적이 있다.
“나는 우리나라 진보 진영이 과연 충분히 진보적인 정치세력인지 묻고 싶을 때가 많다. 민중을 먹여 살리는 것은 경제성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민주주의라는 철저한 신념 없이, 어떻게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중략) 민주주의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밑바닥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상호부조의 협동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자율적으로 사는 게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란 인민의 자기통치를 뜻한다. 복잡한 이론으로 사람 헷갈리게 할 필요가 없다.”
지방선거 앞두고 나타난 구태
민주주의란 민(民)이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말로만 주인이 아니려면, 의사결정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지방자치가 중요하다. 지역의 문제부터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지방자치의 본질이다. 그래서 지역부터 민주주의가 실현돼야 그 국가의 민주주의가 튼튼하게 뿌리내릴 수 있다.
즉 지역에서부터 주민주권이 실현돼야 국가 차원에서 국민주권도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앙정부는 가급적이면 지역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지역주민들의 참여 속에서 지역문제가 결정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중앙정부가 지역문제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에 반(反)하는 것이다.
물론 지방자치를 위해 중앙정부나 국회가 해야 할 역할도 있다. 헌법이나 법률은 결국 국회가 만드는 것이고, 중앙정부도 그와 관련해서 할 역할이 있다. 지방분권을 제대로 실현하고, 지역주민들의 ‘알 권리’와 참여권을 보장하는 내용으로 헌법과 법률을 정비하는 것은 국회와 중앙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다.
예를 들면 헌법개정을 통해서 제대로 된 지방분권을 실현한다든지, 지역에서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회가 독선과 전횡·부패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주민소환·주민투표 같은 제도가 실효성을 가질 수 있게 정비하는 것은 중앙정부와 국회가 해야 할 역할이다. 그러나 그렇게 제도적 보장이 이뤄진 상태에서 지역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지역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양상을 보면, 중앙정부와 국회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있다. 지방분권 헌법개정도 성사가능성이 불투명하고, 주민소환제도 개선은 국정과제로 채택이 됐지만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역시 국정과제인 주민자치회 보편실시도 지지부진하다. 주민자치회 법제화를 위한 지방자치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돼 있고 법제사법위원회까지 통과했지만,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고 있다. 행정통합이 대표적이다. 지방자치단체 간에 통합을 할지 말지는 어디까지나 지역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다. 특히 지역의 주인인 주민들이 주민투표같은 방법으로 의견을 모아야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중앙정부가 나서서 ‘행정통합을 하면 20조원을 주겠다’는 식으로 해서 통합을 밀어붙이는 것 자체가 자치(自治)에 반하는 것이다.
이번에 광주-전남이 통합을 하고 대구-경북과 대전-충남은 통합이 무산됐지만, 통합이 제안되고 추진된 과정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관점에서 냉철한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지역이 입을 피해에도 목소리 못 내는 지역 대표?
게다가 이번 지방선거에 나온 후보자들을 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 후보자가 소수이다. 지방자치단체장 후보자라면 때로는 중앙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맞설 의지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비수도권에서 출마한 후보자라면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용인 반도체 산업단지와 초고압 송전선같은 문제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서, ‘무슨 무슨 산업을 유치하겠다’고 하는 비수도권 정치인들의 얘기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용인에 들어서려고 하는 2개의 반도체 산업단지(SK 일반산업단지, 삼성 국가산업단지)에 원전 15기의 전력이 필요하고, 그중 대부분을 비수도권에 34만5000볼트 초고압 송전선을 건설해서 조달하겠다는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비수도권에 들어설 송전탑 숫자가 1만개, 2만개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높이가 50~60미터에 달하는 송전탑이 역대급으로 들어설 상황인 것이다. 초고압 송전선이 전남, 전북, 충남, 충북, 대전, 세종, 경북, 강원 등을 뒤덮을 상황이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정책에 대해 침묵하면서 어떻게 표를 달라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런 잘못된 정책을 방치하면서 비수도권 지역을 살리고 지역균형발전을 이루겠다는 얘기는 ‘허구’일 뿐이다.
일본 오키나와 현의 지사들은 미군기지 이전을 추진하는 일본 중앙정부에 대해 강력한 반대목소리를 내왔다. 선거 때에 대표 공약으로 ‘미군기지 이전 반대’를 내세운 후보자가 당선되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미군기지 이전을 막기 위해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온갖 노력을 해 왔다.
이런 일을 왜 대한민국의 비수도권 시·도지사들은 하지 못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지방자치단체장이 되려고 하는 후보자들이 대변해야 하는 것은 지역주민들이다. 중앙정부 눈치 보느라고 ‘할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방자치단체장이 될 자격이 없다.
개발주의와 ‘규모화 맹신’에서 벗어나야
그리고 여전히 개발공약이 판친다. 개발을 하면 경제성장이 된다는 것이 기성관념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대한민국 농어촌의 현실을 보면 개발을 해서 농촌의 환경만 파괴되는 일이 허다하다. ‘환경이 오염돼 귀향·귀촌·귀농을 권할 수도 없게 됐다’는 지역들이 늘어나고 있다. 어렵게 유지하고 있던 농촌으로서의 고유한 가치마저 훼손되면 지역의 미래를 담보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여전히 산업단지를 짓고, 개발을 하면 지역이 좋아질 것처럼 주장하는 후보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민들도 이제는 알고 있다. 무분별한 개발을 하면 일부 업체들에게 좋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지역의 잠재적 가능성을 갉아 먹는다는 것이다.
또한 여전히 행정통합을 내세우는 지방선거 후보자들도 있다. 일종의 ‘규모화’의 맹신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덩치를 키운다고 해서 지역이 좋아진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오히려 국내외의 경험을 보면, 통합 이후에 그 내부에서 주변부 지역 소외현상만 심해진다는 분석이 많다. 통합한다고 해서 인구가 늘어나거나 지역경제가 활성화될 리도 없다. 2010년 통합한 마산-창원-진해는 통합 이전보다 8만명 이상의 인구가 줄었고, 지역경제는 침체상태이다.
아무리 중앙정부가 행정통합을 추진한다고 해도, 지역의 입장에서 아니면 아닌 것이다. 그럴 수 있는 후보자가 필요하다.
오히려 지금 내실을 기해야 하는 것은 ‘작은 단위의 자치’이다. 주민이 직접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으려면, 작은 단위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읍·면에서 주민들이 지역의 교육·의료·돌봄·경제·환경·교통·문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더 살기 좋은 지역을 만들기 위해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역활성화 정책이다.
따라서 읍·면의 자치권을 확보하는 것이 현재의 과제가 돼야 한다. 그런 공약을 내건 후보자가 농촌문제 해결을 위해 진정성이 있는 후보자이다. 농어촌지역이 활력을 찾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통합’이 아니라 ‘자치’인 것이다.
또한 농촌에서는 여전히 농업이 가장 중요하다. 농산물 가격과 농민들의 소득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농협의 역할도 중요하다. 내년에는 단위 조합장 동시선거가 있다. 전체적인 농협개혁이 추진되고 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지역이다. 지역에서부터 농촌과 농업을 살리기 위한 농협의 역할이 논의되는 선거가 돼야 한다.
공공성의 가치 실현하기 위한 분투 필요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개발주의와 규모화에 대한 맹신에서 한국 사회가 과연 벗어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한숨이 나온다. 그러나 포기할 일은 아니다.
다시 고 김종철 발행인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그는 “건전한 민주사회가 성립되기 위한 가장 필요한 조건의 하나는 사적 이익에 못지않게 공공성의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정신적 능력이다”라고 일갈한다.
제도가 모든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결국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농촌·농업의 미래도 고 김종철 발행인이 얘기한 ‘공공성의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정신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의 분투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농촌과 마을을 지키고 살리려고 노력하고, 농사와 먹거리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공공성’일 것이다.
※ 이번호를 끝으로 ‘하승수의 ‘농(農)’으로 본 세상’ 연재를 종료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