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기후위기와 생산비 폭등, 농산물 수입과 그에 따른 농산물 가격폭락까지, 농민들은 온갖 악재를 안고 농사짓는다. 이럴 때 농민 부담 경감 및 농산물의 안정적 판로 확보, 적정 가격 보장 노력을 기울이는 게 농협조직의 책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 책무를 실천하는 지역농협은 생각보다 찾기 쉽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어떻게든 농민 옆에 서고자 하는 경기도 안성시 고삼농협(조합장 윤홍선)의 사례는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고삼농협이 위치한 안성시 고삼면 일대 농민들은 주로 양파·마늘을 재배한다. 고삼농협은 기존부터 지역 내 친환경농민들이 생산한 양파·마늘 등을 경기도 학교급식에 납품하며 ‘친환경 농협’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러나 지난해 말과 올해 상반기, 기후위기 및 농산물 가격안정체계 미비 등으로 고삼면 농민들과 고삼농협은 시련 가득한 시기를 보냈다. 지난해 9~10월 유례없는 늦장마로 고삼면 농민들은 예년보다 양파·마늘을 늦게 심었다. 이미 그때부터 작물이 잘 자랄 수 있을지 걱정하는 시선이 가득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3월 초에 고삼농협 측이 자라나는 양파·마늘 상태를 보니 병이 심하게 들었다. 아예 수확 불능이거나, 수확은 했으나 알이 작아서 경기도 학교급식 출하가 불가능해진 작물도 많았다. 경기도 학교급식 상 요구하는 양파 규격은 180g 이상인데, 180g 미만의 양파가 대량으로 나올 상황이었다. ‘규격 미만’ 농산물은 학교에서 안 가져간다.
어디에도 팔 곳 없는 농산물이 일반·친환경을 막론하고 갈 수 있는 곳은 사실상 하나, 가락시장이다. 그러나 가락시장엔 고삼면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팔 곳 잃은 농산물을 ‘헐값’으로나마 팔려는 전국 농민들의 양파가 쇄도했다. 이 상황을 그대로 둘 시 가뜩이나 폭락한 양파 가격이 바닥을 뚫을 것으로 보였다.
사실 지역농협이 판로 잃은 규격 외 농산물을 어딘가에 팔아야‘만’ 한다고 공식 규정하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고삼농협은 양파값 폭락 사태가 예견되던 지난 4월 초부터 고삼친환경학교급식출하회(회장 박우성) 등 지역 농민들과 머리 맞대며 팔 곳 잃은 친환경 미계약 양파의 판로 문제를 논의했다.
올해 고삼농협 친환경 양파 생산 조합원들은 약 650톤의 양파를 생산하는 것으로 계약했는데, 그중 친환경 학교급식 계약 출하물량은 절반이 안 되는 320톤이었다. 나머지 330톤은 미계약 물량이었기에 자체적으로 팔아야 했다. 고삼농협은 농민들과의 합의하에 비규격 양파(파치) 수매가를 △120g 이하 1개당 550원 △120g 초과~180g 이하 750원 △정품(학교급식 품위기준에 맞는 것)임에도 기존 계약량 한계로 못 들어간 물품 950원 등의 가격에 파치 양파를 전량 수매하기로 했다.
이에 더해, 고삼농협은 지난해보다 감소한 농가소득을 고려해 고삼농협 자체 재원으로 추가 장려금을 양파 1kg당 100원씩 지급하기로 했다.
고삼농협의 다음 과제는 ‘판로 확보’였다. 그 과정도 결코 녹록지 않았다. 학교급식 영역 이외의 친환경 양파 판로는 원래부터도 극소수였다. 그나마 한 유통업체에서 고삼농협으로부터 양파를 받아서 홈플러스에 납품해 왔는데, 홈플러스가 파산 지경에 이르렀기에 해당 업체는 납품 대금도 못 받았다. 홈플러스 위기로 인한 농산물 판로 상실 역시 양파 등 농산물 가격폭락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가격폭락 상황을 예견해 온 고삼농협 측은 지난 4~5월에 걸쳐 새로운 판로를 뚫고자 여러 유통업체들과 접촉했다. 유통업체들은 대량 수매가 곤란하다는 입장을 표했다. 평상시라면 유통업체에서 트럭 대여섯 대(약 100톤 안팎) 분량을 수매하나, 유통업체들은 트럭 한 대 정도 물량(약 20톤)밖에 수매하기 곤란하다며 “조금만 더 잘 선별해 달라”고 답했다. 가격이 하도 떨어져 있으니 기껏 수매해도 손해가 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달까. 지난달 말부터 ‘차량 한 대 물량’만 가능하다던 유통업체들이 추가 수매 의향을 내비쳤다. 고삼농협은 유통업체 4곳에 미계약 양파를 납품하기로 했으며, 이번 달 중순까지 농가로부터 수매한 양파 전량을 출하·판매할 계획이다.
길도건 고삼농협 상무는 “최근(지난 4월 이래) 가락시장에 수입 양파를 납품하던 유통업자들이 자율적으로 수입 양파 반입을 중단하는 등의 유통환경 변화도 영향을 끼친 것 아닌가 싶다”고 밝혔다.
외부 요인이 있었다 해도, 농민과 함께하겠다는 고삼농협의 강력한 의지라는 내부 요인이 없었다면 판로 확보는 불가능했을 상황이다. 윤홍선 고삼농협 조합장은 지난 1일 고삼농협 양파 수매 현장에서 농민들과 함께 가진 긴급 간담회에서 “농협의 역할은 안정적 판로를 확보하고 적정 가격을 보장하는 것”임을 재차 천명했다.
지난 7일, 고삼농협 임직원들은 청년농민 조합원 18명과 함께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7.7 전국농민대회’에 참가해 ‘농산물 공정가격제 보장’ 등의 구호를 외쳤다. 적어도 ‘공식적’으로 조합명을 걸고 이번 농민대회에 참가한 곳은 고삼농협이 유일하다. 고삼농협은 용인시에 들어설 예정인 SK하이닉스 반도체 산업단지의 오폐수 직방류 문제(이로 인해 고삼면 소재 고삼저수지가 오염될 가능성 제기)에 대해서도 농민들과 줄기차게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농협이 언젠가부터 ‘아스팔트 농사’에 함께하지 않는다는 농민들의 토로가 이어지고, 농협조직이 때로는 농민 다수의 의사와 반대되는 ‘관제집회’를 연다는 비판도 쏟아진다. 그럼에도 고삼농협처럼 계속해서 지역 농민들과 함께하고, 농민 소득 보장을 위해 분투하는 지역농협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러한 지역농협들이 늘어나는 한, 농민들도 좀 더 희망 안고 농사지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