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업신문= 강혜란 기자) 국내 밀 소비량은 해마다 늘고 있지만 국산 우리밀의 자급률은 여전히 1.5% 안팎에 머물러 있다. 가격 경쟁력과 품질 한계로 오랫동안 수입 밀의 벽을 넘지 못했던 우리밀. 하지만 최근 빵용·면용 맞춤 품종 개발을 시작으로 프리미엄 시장 공략, 민간 계약재배 확대, 학교급식과 가공식품 진출까지 변화의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생산을 늘리는 시대를 지나, 이제는 소비가 우리밀 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시대다. 우리밀은 지금 어디까지 왔을까.
“수입 밀 벽 허무는 제빵·제면용 신품종”
농식품부에 따르면 1인당 밀 소비량은 37.5kg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24년 기준 국내 식용 밀 수요는 연간 약 255만톤에 달한다. 그중 국내 식품업계에서 사용되는 밀가루는 면류가 38.9%, 빵·떡류가 18.5%로 전체의 57.4%를 차지한다. 국내 밀 소비의 절반 이상이 빵과 면으로 이뤄지는 만큼, 결국 면과 빵에 적합한 품질을 확보하지 못하면 시장 확대도 쉽지 않은 구조다.
그동안 국산 밀이 제과·제빵업계에서 외면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가공 적성이었다. 강력분 위주의 수입 밀에 비해 단백질과 글루텐 함량이 낮고 품질 편차가 커 빵과 면을 대량 생산하는 식품업계의 요구를 충족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농촌진흥청은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용도별 맞춤 품종 개발에 집중해왔다.
대표적인 품종이 빵용 밀 ‘황금알’이다. 단백질 함량 14.0%, 글루텐 함량 10.3%를 갖춰 기존 국산 품종보다 제빵 적성을 크게 높였다. 식빵 부피는 994㎖에 달하고 속질도 부드러워 가공성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24년 개발된 ‘백경’은 한 단계 더 발전한 빵용 품종이다. 단백질 함량은 12.9%로 빵 만들기에 적합하고, 생산량도 기존 ‘황금알’과 ‘금강’보다 각13%, 15%씩 많다. 현재 계약재배와 ‘밀 밸리화사업’을 통해 산업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2029년부터 농가 보급이 시작될 예정이다.
면용 시장도 달라지고 있다. 지난해 공개된 ‘한면’은 단백질 함량 10.8%로 국수와 라면에 적합하도록 개발됐으며, 반죽 안정성과 신장성이 우수해 쫄깃한 면발을 구현한다. 소비자 평가에서도 수입 밀과 유사한 수준의 품질을 보이며 국산 면용 밀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틈새시장 공략, ‘신선·안전’이 무기”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2025 식품산업 원료소비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식품산업에서 소맥(밀) 원재료의 국산 비중은 단 0.4%에 불과했다. 반면 직수입(50.5%)과 수입추천대행기관(27.6%)을 통한 물량이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해, 사실상 수입 유통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구조다.
하지만 식품제조업체들이 ‘국산 원료’를 선택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살펴보면 국산 밀이 파고들 틈새시장이 뚜렷이 보인다. 실태조사에 따르면 기업들이 국산 원료를 구매하는 이유는 ‘조달이 용이해서(39.5%)’가 가장 많았다. 이어 ‘소비자가 원산지에 민감한 재료라서(23.3%)’, ‘신선한 원재료가 필요해서(17.3%)’, ‘프리미엄 제품 생산을 위해서(5.9%)’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우리밀은 가격 경쟁력만으로는 수입 밀을 따라잡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유통 과정이 길고 방부제 우려가 있는 수입 밀에 비해, ‘갓 수확한 신선함’과 ‘안전성’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소비자들이 원산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웰빙 시장이나 영유아용 과자, 프리미엄 가공식품 시장을 타깃으로 삼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방증이다.
“원곡에서 가공까지…소비 생태계가 커진다”
국산 밀 산업의 과제는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소비되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최근에는 지자체들이 앞장서서 이 소비의 물꼬를 트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서구와 한국우리밀농업협동조합이 함께 시작한 ‘천원국시’가 대표적이다. 지난 2023년 양동전통시장에서 우리밀 국수를 단돈 1000원에 제공하며 큰 호응을 얻은 이 사업은 현재 10호점까지 확대되며 소비를 이끌고 있다.
경북 구미도 ‘식량대전환 밀밸리화 사업’을 중심으로 우리밀 산업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 구미시는 밀 재배단지 조성과 제분시설 확충, 지역 제품 판로 확대 등을 통해 생산과 제분, 가공, 소비가 지역 안에서 선순환하는 산업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기반 아래 구미밀가리연구회협동조합은 2024년 11월 경북 최초로 제분시설을 준공한 이후 지난해 말까지 약 130톤의 우리밀을 소비했다.
우리밀은 가공식품 시장에서도 빠르게 영역을 넓히고 있다.
협동조합은 현재 우리밀을 활용한 국수와 라면, 만두, 김치만두 등 약 70종의 가공식품을 생산·유통하고 있다. 원맥 판매에 그치지 않고 OEM 방식으로 제품을 개발해 전국에 공급하며 소비 기반을 넓히고 있다. 우리말로 ‘입맛이 당긴다’는 뜻을 담은 ‘꾸쁘라면’과 광주김치를 활용한 ‘우리밀 김치만두’ 등이 대표 상품이다.
천익출 한국우리밀농업협동조합장은 “예전에는 원곡 판매에 의존했다면 지금은 가공식품이 소비를 이끄는 중요한 축이 됐다”며 “우리밀 산업도 생산 중심에서 소비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소규모 업체만으로는 생산량을 모두 소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대형 식품기업들이 제품에 일정 비율이라도 국산 밀을 활용한다면 소비 기반은 훨씬 빠르게 확대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예전에는 품질 때문에 국산 밀을 쓰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품종 개발이 꾸준히 이뤄지면서 좋은 품종이 많이 나와 있다”며 “이제는 품질 개선과 함께 국산 밀을 실제 시장에서 얼마나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민간기업의 참여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국내 주요 식품·제분기업과 농가가 직접 계약하는 민간 계약재배 물량은 지난해 1만500톤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1만톤을 넘어섰다. 5년 전보다 약 3배 증가한 규모다.
판로가 안정되면서 활용 분야도 넓어지고 있다. 현재 45개 식품·외식업체가 정부 지원을 받아 국산 밀 신제품을 개발하고 있으며, 학교와 공공기관이 월 1회 국산 밀 식단을 운영하는 ‘밀 DAY’ 사업도 참여 인원이 3년 만에 10배 이상 늘어 1만8000명을 넘어섰다.
원맥 공급에 머물렀던 우리밀은 이제 가공식품과 학교급식, 외식시장으로 소비 기반을 넓히며 생산 중심 산업에서 소비 중심 산업으로 한 걸음씩 체질을 바꿔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