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 넘게 미국 감자 산업에서 강한 영향력을 유지해 온 품종이 있다. 바로 ‘러셋버뱅크(Russet Burbank)’다. 프렌치프라이에서 베이크드포테이토까지 미국 감자 산업을 이야기할 때 이 품종을 빼놓기 어렵다. 네덜란드에서 개발된 ‘스푼타(Spunta)’, 일본 식탁에 익숙한 ‘메이퀸(May Queen)’ 역시 오랫동안 주요 시장에서 존재감을 이어 왔다. 신품종이 계속 개발되는 작물 육종의 세계에서 오래된 품종들이 여전히 중심에 서 있는 이유는 단순히 농가의 선택이 보수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산업 시스템이 특정 품종을 기준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감자 주산지에서는 씨감자 생산 체계, 농가 재배 매뉴얼, 저장·선별 시설, 가공 공정, 유통 규격, 외식업체와 소비자의 입맛까지 오랜 세월 특정 품종에 맞춰져 왔다. 감자는 씨앗이 아닌 덩이줄기로 번식하기 때문에 새 품종의 씨감자를 농가에 안정적으로 공급하기까지 여러 해가 필요하다. 대형 외식·가공기업 입장에서도 품종 교체는 단순한 원료 변경이 아니라 튀김 색, 식감, 가공 수율, 저장성까지 다시 검증해야 하는 품질 리스크다. 이렇게 형성된 ‘고착(lock-in)’은 더 나은 품종이 나와도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러셋버뱅크’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잘 팔리는 품종은 좋은 유전자를 가진 감자 한 알이 아니라, 그 감자를 중심으로 짜인 시스템 전체다. 농가가 재배하기 편하고, 가공업체가 다루기 수월하며, 유통·외식업계가 예측 가능한 품질을 확보하고, 소비자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체계가 작동할 때 품종은 산업 속에 자리 잡는다. 감자 품종 경쟁력은 우수한 품종 개발과 그 품종이 안정적으로 쓰일 수 있는 산업 시스템이 맞물릴 때 만들어진다.
국립식량과학원은 이러한 현실을 감안해 품종 설계 단계부터 가공·유통 현장의 수요를 반영하는 연구 체계를 강화해 가고 있다. 감자칩, 프렌치프라이, 즉석식품 업체가 요구하는 색과 조직감, 가공 수율, 산지 유통인이 선호하는 크기와 선별 규격, 소비자의 용도별 선호를 조사해 신품종 개발 목표 형질에 반영하고 있다. 또한 품종별 가공·유통 적성을 평가하고, 민간 씨감자 생산자와 가공업체, 산지 관계자와의 협력을 통해 신품종의 현장 적합성을 조기에 검토하고 있다.
씨감자 측면에서도 무병 조직배양묘와 수경재배 기반 미니감자 생산 기술을 고도화해 민간 씨감자 생산 기반과 연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신품종이 품종 등록에 그치지 않고 일정한 품질의 씨감자로 확산될 수 있도록 보급 기반을 강화해 나가고자 한다. 병해 모니터링, 씨감자 품질관리, 산지별 재배·저장 기술도 함께 연계해 품종, 씨감자, 재배 기술, 유통이 하나의 패키지로 농가와 기업에 전달될 수 있도록 지원해 나갈 계획이다.
시장은 가장 새로운 품종보다 가장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품종을 선택한다. 좋은 품종은 개발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씨감자 생산부터 재배, 저장, 가공, 유통까지 이어지는 가치사슬 속에서 검증되고 길러진다. 국립식량과학원은 감자 육종을 품종 개발에 머무르지 않고, 산업 현장에서 실제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조건을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한다. 품종과 씨감자 시스템, 가공·유통 전략을 잇는 연결 고리가 앞으로 우리나라 감자 품종 경쟁력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