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이야기] 인삼과 닭이 빚은 깊은 풍미…삼계탕 한그릇이면 무더위 ‘싹~’](https://www.nongmin.com/-/raw/srv-nongmin/data2/content/image/2026/07/20/.cache/128/20260720500704.jpg)
삼계탕의 역사를 살피고자 조선시대 요리책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아직 발견치 못했다. 이 음식의 역사를 추적하려면 두가지 재료, 곧 닭과 인삼의 연원부터 짚어볼 수밖에 없다.
인삼은 가공 방식에 따라 수삼·백삼·홍삼으로 나뉜다. 수삼은 캐낸 뒤 열흘 안팎만 보관할 수 있어 오래 유통하려면 반드시 건조 가공해야 한다. 백삼은 4년산 수삼의 껍질을 벗겨 햇볕에 말린 것이고, 홍삼은 6년산 수삼을 쪄서 말린 것이다. 홍삼을 만드는 증포소(蒸包所)는 원래 한강 변에 있었으나 1810년(순조 10) 인삼 산지인 개성으로 옮기면서 개성이 홍삼 생산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조선 후기 사람이 닭국에 넣을 수 있었던 인삼은 백삼을 곱게 빻은 가루가 고작이었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요리책으로 꼽히는 1921년판 ‘조선요리제법’엔 저자 방신영(1890∼1977)이 소개한 ‘닭국’ 조리법이 실려 있다.
“닭을 잡아 내장을 빼고 발과 날개 끝과 대가리를 잘라버리고 뱃속에 찹쌀 세숟가락과 인삼 가루 한숟가락을 넣고 쏟아지지 않게 잡아맨 후에 물을 열보시기쯤 붓고 끓리나리라.”
여기에서 인삼 가루는 바로 백삼 가루다. 당시 백삼 가루는 매우 비싸서 이 요리법은 대중적이지 않았다.
조선 후기 닭고기는 사위가 와야 밥상에 오를 만큼 귀한 고기였다. 그런데 1920년대 들어 조선총독부가 농촌 부업으로 양계를 적극 장려하면서 닭고기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양계 권장의 일차 목적은 달걀 생산량 증대에 있었지만 서유럽·미국·일본의 개량 닭을 전국에 보급하면서 식용 닭 공급도 덩달아 늘었다.
닭이 흔해지자 앞의 닭국처럼 백삼 가루와 닭고기의 결합이 가능해졌다. 1937년 6월27일자 ‘동아일보’ 상품시황은 여름에 계삼(鷄蔘)의 수요가 상당해 산지에서 품귀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 속 계삼은 닭고기에 들어가는 개성 백삼 일등품을 가리킨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문헌에서 ‘계삼탕’이라고 명확히 표기한 사례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삼계탕 등장의 전환점은 1960년대 중반이다. 냉장 유통인프라가 갖춰지면서 수삼을 전국적으로 공급하는 게 가능해졌고 한국 정부의 양계업 지원 정책으로 닭고기 생산량도 급증했다. 이 두 조건이 맞물리자 서울 음식점은 ‘삼계탕’이라는 음식 이름을 메뉴판에 올렸다.
삼계탕의 국제화는 통조림에서 시작했다. 1974년 한 식품회사가 삼계탕 통조림을 개발해 일본에 수출했고, 1983년 레토르트 제품이 국내 처음 등장했다. 1985년부턴 일본·미주·홍콩·동남아로 수출이 이어졌다. 인삼에 친숙한 아시아 소비자와 종교적 금기가 없는 닭고기가 결합한 삼계탕은 어떤 케이푸드(K-Food·한국식품)보다 앞서서 세계화의 길을 걸었다.
1992년 삼계탕은 냉동식품으로도 개발돼 호주와 중국 시장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이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2021년 중국 드라마 ‘금심사옥’에서 삼계탕을 한국 음식으로 명시하지 않아 한국 누리꾼의 항의를 받는 일이 벌어졌고, 중국 최대 포털 바이두 백과사전은 삼계탕을 광둥요리로 기술했다. 그래도 세계 언론은 한국의 삼계탕에 주목했다.
2017년 7월 미국 ‘뉴욕타임스’는 ‘충분히 뜨겁나요? 더 뜨거운 음식을 먹어보세요’라는 제목으로 삼계탕을 소개했다. 무더운 여름에 오히려 뜨거운 국물을 먹으며 땀을 내는 ‘이열치열(以熱治熱)’ 지혜를 제대로 파악했다. 해마다 여름철 기온이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우는 요즈음, 삼계탕으로 체온을 낮춰보자.
주영하 음식 인문학자·한국학중앙연구원 민속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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