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농민들이 거리에 나섰다. 시민의 반응은 다양했지만 늘 보던 풍경이라 으레 그렇겠거니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벌써 수십 년째 농민들은 ‘더 이상 못 살겠다’고 부르짖고 있는데, 구호나 정책 요구가 별반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농민의 외침이 달라지지 않은 것은, 그 세월 동안 농민의 삶이 나아진 게 없고, 농업이 처한 여건이나 위상은 오히려 더 나빠진 데 연유한다.
농업 바깥으로 고개를 돌리면 눈이 돌아갈 정도로 대한민국은 변했다. 세계 경제 10대 강국에 진입하고 무역 규모 순위에서 8위라는 성과 위에, 올해 정부는 잠재성장률 3%, 무역 4대 강국 진입, 국민소득 5만불 시대를 상징하는 ‘3·4·5 비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코스피 1만포인트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고, 삼성전자 한 곳의 올해 영업이익만 연 400조원를 넘길 것으로 예상한다. 우리나라 전체 농업 생산액이 60조원 전후인 것과 비교해 보면 입이 벌어질 정도다.
농가소득은 작년에 5400만원대에 이르며 전년도에 비해 8%의 급성장을 보였다. 하지만 그 전 해의 저조한 성과에 따른 착시 효과도 있고, 올해 예상치는 다시 마이너스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농가소득의 기반이 튼실해졌거나 구조적으로 개선돼 나온 성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직불금이나 농어촌 기본소득 도입에 따른 이전소득의 증가 덕분에 농가소득이 늘어난 점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 30여년 동안 농가당 농업 소득은 연 1000만원 전후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농업 소득이 30여년을 멈춰 있는 동안 농업 여건은 더 나빠졌다. 심각한 고령화와 이농, 그에 따라 심화한 인력난에 고유가로 인한 농자재비의 급등은 농산물 생산비의 급증으로 이어졌다. 그것도 모자라 기후위기를 넘어서는 기후 재앙의 최전선에 내몰린 대한민국의 농업은 기댈 곳이 없어졌다. 당장 이웃 중에 농사를 포기하거나 겸업을 택하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었다. 이제 농촌은 농업을 통해 먹고사는 농민의 삶의 공간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그래서일까? 최근 들어 부쩍 농업과 농촌에 대한 논쟁적인 글들이 늘어났다. 농업에 관한 한 백가쟁명의 시대를 맞이하는 느낌마저 든다. 국회를 중심으로 계속 이어지는 토론회와 전문가의 고견을 담은 기사까지 농업과 농촌에 대한 다양한 처방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소농 중심의 농업 구조가 농업의 취약성을 초래하고 농민의 가격 협상력을 떨어뜨렸다는 견해와 이에 대한 반론까지 양쪽 다 나름 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경쟁이 제한된 공판장 중심의 농산물 시장이 유통과정을 복잡하게 하고 비용을 증대시킨다는 진단을 내놓으며 경쟁 제한적 규제를 철폐하고 공정가격 보장 제도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현장의 농민들은 농산물 가격은 제자리인데 농자재 가격과 인건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현실을 토로하기도 하고, 농식품부가 농산물의 공정가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지 않고 물가 관리 대상으로만 다룬다고 아우성친다. 결국 농업 정책 부재와 무능을 질타하기에 이르렀지만, 솔직히 이 주장들 또한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다. 농업이 정체된 만치 농업을 둘러싼 논쟁 역시도 정체된 느낌이다.
난마처럼 얽히고 굳어진 농업 현실이 단칼에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양파와 배추를 갈아엎은 농민이 다시 용기를 내고 씨를 뿌리기 위해서는 적어도 내일의 농업 현실은 오늘보다 나아질 거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며칠 전 대통령이 우리 농업 보조금이 선진국 수준에 많이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고 바로 잡아야 함을 역설했다. 정치적 수사를 넘는 진정성을 믿는다. 하지만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3·4·5 비전’ 속에 농업이 들어가야 하고, 국가 백년대계 속에 농업이 자신의 합당한 위상을 확보해야 한다.
농어촌기본소득 시범사업을 도입한 정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만, 이 제도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농업을 통한 소득개선이라는 과업을 같이 달성해야 한다. 농정 부재를 질타하는 비판이 쏟아지지만, 농협 개혁과 농지 이용 실태의 전면 조사 등 이 정부만치 근본적인 농정 개혁을 시도한 예도 없다. 농어촌기본소득의 전면적 도입과 농업 보조금의 획기적 확대도 기대된다. 하지만 대한민국 농업의 장기적 비전이 부재하고 농정당국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어떤 정책 목적도 달성할 수 없다.
국가책임농정은 국민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함으로써 건강한 국가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첫걸음이다. 농민은 희망찬 농업 비전을 가지고, 신뢰할 수 있는 농정당국을 파트너로, 농업이 여타 산업과 동반 성장하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