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물 부족에 농민 간 ‘물싸움’까지
200평 논에 300톤 퍼부어도 해갈 요원
벼 이삭 형성기 직격탄…수확량 감소 불가피
“특별재난지역 선포·농업용수 대책 마련해야”
(한국농업신문=강혜란·박현욱 기자)
지난 6일 경북 경주시 내남면의 한 논.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진 논바닥 위에서 잎끝이 누렇게 변한 벼들이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을 대도 갈라진 틈으로 순식간에 스며들 뿐 논바닥에는 좀처럼 물이 차지 않았다.
유례를 찾기 힘든 가뭄과 연일 계속되는 폭염이 경북 경주와 포항을 비롯한 영남 동남부지역 농촌을 집어삼키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농민들은 “오죽하면 태풍이라도 오라고 빌겠느냐”며 타들어가는 농작물을 바라봤다.
폭염과 가뭄이 이어지면서 경북 벼 주산지의 농업용수 부족이 심화되고 있다. 출수기는 벼의 수량과 품질을 좌우하는 시기로 충분한 수분 공급이 필요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생육이 평년보다 10~15일 늦어지고 있다. 농가들은 지금 비가 내리더라도 이미 발생한 생육 지연과 등숙 불량을 완전히 회복하기는 어렵다고 우려하고 있다.
“70년 평생 이런 가뭄은 처음입니다. 어제 빗방울이 떨어지기는 했는데 셀 수 있을 정도였어요. 한 50방울, 60방울 왔으려나. 비가 왔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농민들의 입에서는 한숨부터 터져 나왔다. 한 달 넘게 제대로 된 비를 구경하지 못한 데다 땅을 파고 관정을 뚫어도 물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농민들은 “땅을 파도 파도 바싹 말라 있다”며 “이제는 하늘만 쳐다보는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 이번 가뭄은 장마전선과 비구름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은 포항과 경주, 울산 등 영남 동남부지역에 집중됐다. 포항의 7월 강수량은 41㎜에 그쳐 전년 같은 기간의 6분의 1 수준에 머물렀다. 경남지역도 지난 6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 내린 비가 162㎜로 평년 강수량 487㎜의 33%에 불과했다.
비가 내리지 않은 가운데 40도에 육박하는 폭염까지 이어지면서 논과 밭의 수분은 빠르게 증발했다. 전날 물을 댄 논도 하루가 지나면 바닥을 드러낼 정도다.
저수지 가까운 논만 ‘찔끔’…끝자락은 농사 포기
경주시 내남면 일대 농업용수는 박달저수지에서 공급된다. 모내기 당시만 해도 가득 차 있던 저수지는 계속된 가뭄과 고온으로 빠르게 말라붙었다. 현장을 찾은 이날 저수지 어귀는 이미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주민들은 남은 물도 하루나 이틀 정도 버틸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경주시 내남면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박달저수지 저수율은 19.4%로 평년 73.0%, 지난해 87.1%를 크게 밑돌았다. 농촌용수종합정보시스템에 따르면 5일 기준 경북지역 농업용 저수지 평균 저수율도 47.9%로 지난해 같은 기간 69.3%보다 21.4%포인트 낮았다.
출수기는 벼가 생육기간 중 물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시기다. 이 시기에 수분이 부족하면 출수가 늦어지고 수정과 등숙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등숙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알곡이 제대로 여물지 못해 수량 감소는 물론 미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그나마 저수지와 가까운 논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수문을 열어도 물이 마을과 농경지를 차례로 지나면서 줄어들기 때문이다. 상류 농가들이 말라붙은 논에 물을 채우고 나면 하류와 수로 끝자락까지 내려갈 물은 거의 남지 않는다.
현장에서 만난 한열림 (사)한국쌀전업농경주시연합회장은 “저수지에서 물을 빼도 중간에 있는 논들이 워낙 말라 있어 물을 전부 빨아들인다”며 “위쪽 논에 물을 채우고 나면 끝에 있는 논까지는 물길이 닿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예전에는 논 하나에 두 시간 정도 물을 대면 됐지만 지금은 다섯 시간을 대도 차지 않는다”며 “갈라진 땅속으로 물이 끝없이 들어가니 아무리 퍼부어도 표시가 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농민들은 논마다 양수기 여러 대를 설치하고 물이 나올 만한 곳을 찾아다니고 있다. 낮에는 폭염을 견디며 수로를 정비하고 밤에는 순서를 기다려 물을 댄다. 그러나 정작 양수기를 설치해도 퍼 올릴 물 자체가 없는 곳이 적지 않았다.
“논 살려야지”…조사료용 옥수수는 포기
가뭄 피해는 벼에만 그치지 않았다. 박달저수지에서 멀지 않은 조사료용 옥수수밭은 황폐한 벌판으로 변해 있었다. 옥수수 줄기는 사람 허리에도 미치지 못한 채 누렇게 말랐고, 잎은 바스러질 정도로 수분을 잃었다. 당장 비가 내려도 정상적인 생육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해당 농가는 약 4000평 규모의 조사료용 옥수수밭을 사실상 포기했다. 물을 많이 소비하는 옥수수밭을 살리려다 주변의 논까지 물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한 회장은 “조사료용 옥수수를 재배했지만 한정된 물을 벼에 먼저 공급하기 위해 조사료는 사실상 포기했다”며 “옥수수가 말라 이미 전멸된 상태고 수천만원대의 피해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한정된 물 놓고 농민 간 고성…“인심까지 마를 판”
가뭄이 길어지면서 한정된 농업용수를 둘러싼 농민 간 갈등도 커지고 있다. 물길을 어느 논에 먼저 댈 것인지, 살수차를 어느 농가에 보낼 것인지를 놓고 고성이 오가는 일도 벌어진다.
경주시가 살수차와 양수기, 굴착기 등을 투입하고 있지만 피해 면적에 비해 장비와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 한 마을에 투입할 수 있는 살수차는 서너 대에 불과하고, 물을 길어오는 거리와 시간을 고려하면 하루 운행 횟수도 제한적이다.
200평 규모의 바짝 마른 논을 적시는 데 약 300톤의 물이 필요하다는 것이 현장 농민들의 추산이다. 한 차례에 수십 톤을 퍼부어도 논바닥의 갈라진 틈으로 물이 빠져나가 해갈에는 역부족이다. 결국 일부 논에 물을 집중해도 한 필지를 제대로 살리기 어려운 실정이다.
한 주민은 “누구 논에는 물을 주고 누구 논에는 주지 않느냐는 항의가 나올 수밖에 없다”며 “물을 기다리던 농가들이 수로를 막거나 자기 논으로 먼저 돌리면서 이웃끼리 얼굴을 붉히는 일까지 생긴다”고 안타까워했다.
지자체도 가능한 예산과 인력을 긴급 투입하고 있지만 민원이 폭주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주민들은 지자체 차원의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며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요구했다.
한열림 회장은 “농사를 평생 지었지만 이런 가뭄은 처음”이라며 “바짝 마른 논 200평에 300톤가량의 물을 쏟아부어도 금세 말라버릴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살수차 몇 대를 지원해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를 이미 넘어섰다”며 “한정된 물을 누구에게 먼저 공급할지를 두고 농민들이 다투고 지자체는 민원에 시달리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벼 이삭 형성기 직격탄…쭉정이 증가 우려
더 큰 문제는 이번 가뭄이 벼의 이삭이 형성되는 중요한 생육 시기와 겹쳤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물이 부족하면 이삭 수와 낟알 수가 줄어들고 쭉정이가 늘어 수확량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뒤늦게 비가 내리더라도 이미 생육이 멈추거나 잎이 타버린 논은 피해를 회복하기 어렵다는 게 농민들의 설명이다.
한 회장은 “지금은 벼가 이삭을 만들기 위해 물을 가장 많이 흡수해야 하는 시기”라며 “가뭄이 계속되면 이삭이 제대로 올라오지 못하고 쭉정이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이어 “결국 수확량이 줄고 농가소득 감소로 연결된다”며 “농작물재해보험에 가입한 농가는 일부 보상을 기대할 수 있지만 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농가들은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포항 끝자락 논도 ‘물 한 방울’ 없어
같은 날 찾은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죽성1리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상류에서 내려온 농업용수는 여러 마을과 수로를 지나며 갈라졌다. 처음 100의 물을 내려보내도 수로 끝자락에 도착하는 양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농민들의 설명이다. 신광면 일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반곡저수지 저수율도 41.7%로 평년(79.0%)의 절반 수준에 머물렀다.
차동윤 (사)한국쌀전업농경북도연합회 사무처장은 “영덕과 포항, 경주, 영천 등은 저수율이 크게 떨어져 농업용수 확보가 쉽지 않다”며 “물을 제때 대지 못해 벼 키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 데다 출수기 수분 부족으로 등숙률이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등숙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싸라기와 쭉정이 비율이 늘어 상품성이 떨어질 수 있다”며 “수확량 감소는 물론 미질 저하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논바닥이 워낙 말라 물을 대는 시간도 과거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양수기를 하루 종일 가동해도 논 한두 필지를 적시기 어렵고, 엔진이 과열돼 5시간을 돌린 뒤 1시간을 식히는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
그는 “위쪽 논에 물을 대고 아래쪽으로 내려보내려 하면 또 서로 먼저 물을 쓰겠다고 다툼이 생긴다”며 “일주일째 양수기를 돌리며 물을 내려보내고 있지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부 농가는 논 아래 작은 관정에서 나오는 물을 구덩이에 모은 뒤 양수기로 다시 위쪽 논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그러나 관정마저 마르거나 지하수가 나오지 않는 곳이 속출하면서 농사를 포기하는 논도 늘고 있다.
“일회성 급수 넘어 농업용수 체계 바꿔야”
농식품부와 지자체, 한국농어촌공사가 급수차 투입과 관정 개발, 양수저류 등 가용 수단을 총동원해 비상 용수 공급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이러한 응급 대책만으로는 매년 반복되는 가뭄을 극복하기에 여전히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기후변화에 따른 강수 편차와 고온 장기화에 발맞춰, 농업용수 공급체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정비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한열림 회장은 “이번 가뭄을 올해 한 번으로 끝날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지금의 기후변화를 보면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며 “예전처럼 일시적인 재해가 아니라 기후변화가 일상이 된 만큼 농업용수 정책도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가뭄이 닥칠 때마다 관정을 파고 살수차를 보내는 식의 응급처방으로는 한계가 있다”라며 “특별재난지역 선포와 함께 저수지 준설, 양수장 신설, 보 퇴적토 제거 등 안정적으로 물을 확보할 수 있는 기반시설을 국가 차원에서 장기적으로 확충해야 한다”고 말했다.
차동윤 사무처장도 “지금의 농업용수 시설은 과거 강수량과 영농 여건을 기준으로 조성된 곳이 대부분이어서 최근처럼 폭염과 가뭄이 장기화하는 기후에는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라며 “기후가 이미 바뀐 만큼 농업생산기반도 그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역마다 용수 확보 여건과 물 부족 양상이 다른 만큼 획일적인 대책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특히 용수 공급 말단 지역은 같은 저수지 물을 사용하더라도 가장 늦게 물을 공급받는 구조인 만큼 저수지와 수로, 양수시설 등 농업용수 공급체계를 지역별 여건에 맞게 점검하고 보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