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5개들이 다섯 봉, 양배추 다섯 통.
며칠 전 일요일 30여년간 거래해 온 지역 생협에서 영농조합을 통해 내게 온 발주량이다. 보통 생협 발주는 일요일이 해당 주 첫 발주다. 금·토 이틀 쉬다가 일주일 첫 발주가 나오는 날이라 평일 발주보다 양이 많은데, 이건 아니다 싶다. 요즘 발주가 영 시원찮지만 좀 심하다.
2년 전 영농일지를 찾아봤더니 오이 발주가 다섯 배는 많다. 다른 농가들에게 가는 발주도 마찬가지다. 요즘에는 집에서 조리하는 게 줄어 생협 전체 매출이 전반적으로 떨어졌다고는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새 우리 영농조합과 생협 사이가 나빠진 것도 아니고 우리 영농조합 농산물 품질이 나빠져서도 아니다. 범인은 농산물 할인쿠폰 행사다.
한 달쯤 전이던가 미국-이란 전쟁으로 고유가 지원 대책을 발표할 때다. 그 뉴스가 나오길래 농업 쪽 지원 대책을 신경 써서 들었더니 과연 또 농산물 할인쿠폰이 나온다. 무릎이 꺾인다. 이미 몇 년 동안 농산물 할인쿠폰에 얻어맞다 보니 그리된다.
할인쿠폰 제도는 생산자단체에 사업을 주지 않는다. 유통단체에 사업을 준다. 이런저런 생협연합회나 하나로마트, 대형마트 같은 덩치 큰 조직들. 그래서 그런 유통단체에 줄을 대지 못한 농가들은 할인 혜택을 받지 못한다. 우리 영농조합에서 나오는 몇 가지 친환경 채소 외 대부분의 생활재를 연합회를 통해 공급받는 지역 생협 입장이 난감해지는 순간이다. 할인 혜택이 없어 상대적으로 20% 정도 비싸게 돼버린 우리 영농조합의 농산물을 매장에 내놔도 팔리지가 않으니 영농발주를 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 영농과 오랫동안 관계해온 의리가 남아 있어서 오이 다섯 봉, 양배추 다섯 통 발주라도 온 것이다.
이 정책이 나온 지는 몇 년 됐다. 처음 할인쿠폰 행사 때 우리 영농조합은 어퍼컷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행사가 끝나면 곧 정상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었는데 그 횟수가 점점 늘기 시작했다. 어퍼컷 한 대 얻어맞고 정신을 차릴 만하면 훅이 한 방 배를 강타하고, 또 정신을 차릴 만하면 카운터 펀치가 들어오고…. 해마다 생협과의 거래액이 20~30%씩 줄어들고 있다. 이러다가 오래 못가지.
우리 영농조합은 생협연합회 생산단체가 아니다. 원래는 이런저런 생협연합회에 친환경 채소를 공급했었다. 십수 년 전 연합회들이 생산자단체들을 자기 조직에 줄세우기를 경쟁적으로 했던 시절, 우리 영농조합은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문은 ‘이런 행사가 대부분 농림축산식품부 예산으로 하는 건데 왜 직접 농민들을 지원하는 방식이 아니고 유통집단을 지원하는 방식일까’이다. 당구의 쓰리쿠션도 아닌데. 보통 공공급식에서 시행되는 차액지원 비슷한 것으로 보이나, 차이는 지원액의 종착점이 농민이 아니라 유통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유통집단에 줄 서지 않은 소규모 자존심 강한 영농조합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아니 소외 이상이다. 고사하고 있다. 요즘 많이 늘고 있는 개인 소비자들과 직거래에 기대 농사짓는 소규모 농민들도 같은 경우다. 그들의 경우 소비자들에게 매장에서 파는 농산물보다 왜 비싸게 파느냐는 항의를 받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졸지에 폭리를 취하는 농사꾼이 돼버리다니.
이성적으로 판단해보려고 애를 써봤다. 농식품부 고위관료들은 겁나게 바쁘고 일도 많다. 일을 효율적으로 해내지 않으면 그 많고 중차대한 일들을 다 처리할 수 없다. 할인쿠폰 사업을 유통집단에게 주니 일이 아주 효율적이다. 덩치 큰 집단 몇 군데만 선정해서 사업을 주면 세부적인 실무도 알아서 하고 정산도 척척이니 아주 효율적이다. 몇 번 하다 보니 깨달은 요령이다. 게다가 중앙정부의 서민 물가안정 기조에 발맞추는 모양새이니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뭐 농민들이 문제제기를 하지만 그 양반들도 농산물 판매에 도움이 되는 건 맞으니까 대충 그냥 뭉개고 가도 되지. 다른 중차대한 문제들도 널렸는데 이것까지 신경 쓸 겨를도 없는 것 같고.
어쩌다 보니 서민들이 팍팍해지는 것과 대형유통에 줄서기를 못한 농민들이 질식사당하는 것이 연동돼버렸다. 동병상련이라도 느끼라는 건가. 농식품부 예산으로 이런 짓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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