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정부 시절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쓰러져 유명을 달리한 지 올해로 10년이다. 당시 농민들의 시위 구호는 명료했다. “내년에도 농사짓자!” 그로부터 10여년 사이에 정권은 세 번이나 바뀌었고, 촛불혁명으로 만들어 낸 정부가 들어섰지만, 농민들은 가마솥 같은 땡볕 아래서 똑같은 구호를 외쳐야만 했다. 농민들이 이 구호를 다시 꺼내 든 이유는 단순하고도 절박하다. 전방위적으로 채소 가격이 폭락하고 있는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관성적으로 농산물을 물가 상승의 주범으로 몰아가는 정부의 행태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현실은 참담하다. 평년 대비 양배추의 도매가격은 60% 가까이 하락했고, 양파·애호박·배추·오이 등 주요 채소류의 도매가격 역시 평년 가격의 3분의 2에서 4분의 3 수준에 머물러 있다. 비룟값, 인건비 등은 치솟고 있는데 농산물 가격은 바닥을 치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국무회의에서는 물가 안정과 민생을 운운하며 농민의 고통을 외면하는 ‘유체 이탈’ 화법을 계속하고 있다. 이른바 국민주권정부에서조차 “내년에도 농사짓자”라는 구호를 외쳐야 하니 농민들의 실망감이 얼마나 크겠는가.
이재명정부는 농업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인식과 이해도를 바탕으로 실효성 있는 농업정책을 실현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바가 컸다. 물론 농어촌기본소득이나 햇빛소득 정책 등으로 농가의 이전소득이나 농외소득이 증가할 여지는 커졌지만, 이것이 농업과 농촌이 당면한 구조적 문제의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 농가소득을 두텁게 떠받치는 정책도 분명 필요하고 당연히 병행돼야 한다. 그러나 농가소득에서 농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까스로 20%를 넘고 있는 참담한 상황에서, 농산물 가격 폭락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영농 없는 농촌’, ‘농민 없는 농촌’이라는 전대미문의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영농을 떠난 정책은 농업의 근간을 말살하는 살농(殺農) 정책일 뿐이다. 기본에 충실한 농업정책, 정의롭고 공정한 농업정책의 진정한 출발점은 농민이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터전을 조성하는 데 있다. 정부는 당장의 폭염과 싸워야 할 농민에게 무거운 책임감으로 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