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전략작물’의 육성 목적이 식량자급률 제고라 본다면 밀은 최고의 전략작물이다. 국민 식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면서도 국내 생산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자급률을 조금만 높여도 식량안보와 국민건강에 혁신적 기여를 할 수 있는, 전략적 가치가 독보적으로 우수한 품목이 밀이다.
하지만 정부 전략작물직불제에서 밀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ha당 직불단가가 조사료 550만원, 수급조절용벼 500만원, 수수·메밀 240만원, 콩·가루쌀 200만원, 심지어 옥수수·깨조차 150만원인데 밀은 100만원에 불과하다. 전략작물직불제를 벼 수급조절 중심으로 운영하다 보니 벼와 작기가 겹치지 않는 밀은 상대적으로 경시되고 있는 것이다.
전략작물직불제는 출발부터 애매한 면이 있었다. 시행 취지는 ‘농업·농촌 공익기능 증진과 농업인 소득안정’이지만, 전략작물의 정의를 ‘식량자급률 증진, 양곡 수급관리, 논 이용률 향상 등을 위해 논에서 재배하는 작물’이라 설정했다. 2023년 제도 시행 당시 만성적 쌀값 불안 상황에서 정부는 이를 논 타작물 재배 유도에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양곡 수급관리(벼 재배 대체) 기능이 없는 동계작목은 마치 ‘반쪽짜리 전략작물’인 듯한 그림이 됐다. 중요도가 후순위로 밀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산밀 생산자들은 줄기차게 직불금 현실화를 요구하고 있다. 부안우리밀영농조합법인(부안우리밀)은 ha당 밀 생산비를 600만~700만원대, 조수입을 300만원 수준으로 계산하고 있다. 물론 여건에 따라선 생산비를 줄일 개인적 수완이나 정책 보조 등이 있지만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도 ha당 100만원의 현 직불금으론 도저히 정상적인 농업소득을 올릴 수 없다는 계산이다.
그럼에도 국산밀이 일단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건 농민들의 희생 때문이다. 대다수의 밀 농가는 벼·콩 등 하계작목을 주작목으로, 밀을 부작목으로 인식하고 있다. 밀농사는 기껏해야 ‘벼농사 농비나 벌충하는’ 수단으로 치부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모작으로 1년에 두 배의 노동을 하고도 정당한 소득을 얻지 못하는 불합리, 즉 사회적 노동 착취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직불금 인상은 단지 밀농가의 소득을 정상화시키는 차원이 아니라, 밀산업 전체를 활성화시키는 수단으로도 그 활용을 고민해볼 수 있다. 만약 직불금을 높이는 대신 수매가(농가수취가)를 어느 정도 낮추는 방향의 양해가 이뤄진다면, 국산밀은 지금보다 나은 조건에서 수입밀과 경쟁할 수 있다. 심상준 우리농촌살리기공동네트워크 대표는 “수입밀이 kg당 300~400원, 국산밀이 1000원이다. 직불금을 올리고 수매가를 낮춰 국산밀을 800원 정도로 팔 수 있다면 수입밀과 3배였던 가격차가 2배가 된다. 그럼 한번 싸워볼 만하다”라고 설명했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접근이다. 송동흠 우리밀세상을여는사람들 운영위원장에 따르면 유럽 등 해외 여러 나라의 전략작물(밭작물) 직불제는 수입산 대비 국산의 가격열위를 직불금으로 극복하려는 이념을 확실하게 세우고 있다. 일본 역시 낮은 수매가와 이를 상쇄하는 적극적 직불정책으로 이제 밀 자급률 20%를 바라보고 있다. 쌀 수급조절용 혹은 단순 교부금 성격으로 운영하는 우리나라의 전략작물직불제는 철학과 고민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지난해 생산자들의 요구를 일부 수렴해 ha당 50만원이었던 밀 직불금을 100만원으로 인상했다. 이 과정에서 품종별 수매가를 차등해 일부 품종(새금강)의 가격을 낮추는 효과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직불금 인상 결정 당시에도, 수령 이후에도 생산자들은 웃지 못했다.
유재흠 부안우리밀 이사는 “직불금이 50만원 늘었지만 생산비가 늘어나면서 농민들도 효능감을 못 느꼈고, 새금강 외 소비 주력 품종의 가격이 오히려 오르면서 소비자도 효과를 체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생산자들은 300만~400만원 정도의 확실한 직불금 인상과 수매가 인하를 주장했던 것”이라며 답답해했다.
국산밀은 농산물 품목 중에선 드물게 품목 육성을 위한 별도의 법률(밀산업 육성법)이 제정돼 있고 법률에 따라 2021년부터 5년 단위의 기본계획이 운영 중이다. 기본계획 안엔 현재 1.5%인 밀 자급률을 2030년 8%로 끌어올린다는 구체적 계획까지 세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원초적 사업인 직불제에조차 예산 투입이 인색한 모습이다. 법령과 정책 의지의 괴리 상황이다.
그 사이 국산밀은 다시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유재흠 이사는 “농민들이 밀의 소득구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게 지난해와 올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올해 밀 생산량도 굉장히 많이 줄어들 테지만 내년산 파종면적도 늘지 않을 것이다. 크게 돈도 안되는데 괜히 벼·콩 농사가 늦어지기만 하니, 차라리 수확이 빠르고 작업이 수월한 보리를 심거나 아예 안 심겠다는 농민들이 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식량자급률 증진, 양곡 수급관리, 논 이용률 향상 등을 위해 ‘논에서 재배하는’ 작물. 공익직불제법 시행령이 규정한 이 ‘전략작물’의 정의는 밭밀 재배 농민들에겐 울분의 원흉이다.
밭밀은 논밀과 똑같은 성격을 띤다. 애초에 벼와 작기가 다른 만큼 벼 수급조절엔 기여할 수 없지만 식량자급률 측면에선 어떤 품목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정부가 불완전하게나마 논밀에 전략작물직불금을 지급하고 있는 이유다.
하지만 밭밀은 단지 밭에 심겼다는 이유로 전략작물직불금 대상에서 배제된다. 본래가 밭작물인 밀은 진흙땅인 논보다 물빠짐이 좋은 밭에서 생산성이나 품질이 더 우수한 경향을 보이는데 정책에선 이것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과거 밭작물직불금 시절엔 적은 금액이나마 지급받을 수 있었는데, 전략작물직불금으로의 개편이 오히려 개악이 된 셈이다.
제주에선 밭밀이 특히나 큰 의미를 갖는다. 제주의 기후환경상 동계작목 소득은 하계작목과 동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게 취급된다. 게다가 양채류·메밀·콩 등 재배 품목이 몇몇 가지로 국한돼 폭락이 발생하기 쉽기 때문에, 밀은 없어선 안될 재배 분산 수단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논이 없는 제주에서 재배하는 밀은 100% 밭밀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제주 밭밀 농가들의 호소는 논밀 농가들의 직불금 현실화 요구보다 더 절박할 수밖에 없다. 문성기 제주 백운영농조합법인 대표는 “제주엔 애초에 논이 없지 않나. 100만원이든 300만, 400만원이든 육지(논밀)와 똑같이 직불금을 줘야 하고, 그래야 제주 밀 재배도 활성화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제주에도 지목상 답(논)이 있고 담수는 안되지만 여름에 스프링클러를 돌려 벼농사를 짓기도 한다. 그럼 이 땅에 밀을 심을 테니 직불금을 달라 했더니 농식품부에서 안된다고 하더라. 제주엔 애초부터 직불금을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라며 정책에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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