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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는] 기능올림픽⑥ 멀고도 고달팠던 양복 장인(匠人)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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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1966년 9월에 실시되었던 전국기능경기대회에 양복 부문의 선수로 출전했던 이정구는 3등 바깥으로 밀려나 입상하지 못하였다. 그 대회에서 부문별로 금메달을 딴 선수들만이 이듬해 7월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제16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참가할 자격이 부여됐다.

지역 예선도 거치지 않은 채 편법으로 서울 대표로 차출됐던 터라, 언감생심 메달을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기왕에 참석한 것, 뭔가 배워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입상자를 발표한 직후, 이정구는 자신이 만들어 제출했던 시제품 양복저고리를 들고서 심사 위원에게로 갔다.

-심사위원님, 제 작품을 보시고, 잘못된 부분을 좀 지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만….

-그래 어디 보자. 으음… 여기 저고리의 가슴 부분을 봐요. 가슴은 여자만 나오는 게 아니거든. 남자도 볼륨이 있단 말이지. 그러니까 남자 상의도 약간 볼록하게 곡선을 만들어 줘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하려면 여기 겉감하고 속에 넣는 심지, 그리고 안감이 삼위일체로 잘 맞아 돌아가야 하는데, 지금 이정구 군이 만들어 놓은 양복을 보면 너무 밋밋하잖아?

-아, 그렇겠네요. 시골 대천에 있는 양복점에서는 그냥 평평하게 작업을 해버렸는데….

-여기 어깨 부위도 보라구. 어깨에 솜을 넣을 때도 인체 모양 그대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도록 넣어줘야 하는데, 이건 너무 각이 졌지?

-아, 정말 그렇네요. 그럼 어떻게 하면 어깨선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까요?

-겉감은 바깥을 감싸야 하니까 솜을 많이 넣어 줘야 하겠지만, 안감은 맨 안쪽에 들어가게 되니까 양을 적게 해야 전체적으로 완만한 곡선이 되지 않겠어? 앞으로 그 점을 유의하시게.

-아하, 그렇게 해야 되는구나. 선생님, 정말 감사허구먼유.

이정구가 전국기능경기대회에 처음 참가하여 얻은 게 있었다면, 자신의 실력이 한참 모자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다음 해 여름, 휴가철을 맞아 이정구는 모처럼 대천해수욕장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었는데, 우연히 흘러나온 라디오 뉴스에 귀가 번쩍 뜨였다.

-정오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는 금년에 처음으로 참가한 제16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 두 개와 은메달 하나, 그리고 동메달 하나를 각각 획득했습니다. 우리나라에 금메달을 안겨준 종목은 양복과 제화 부문인데….

-우와, 양복에서 금메달을 땄어!

이정구는 마치 제가 금메달을 딴 듯이 펄쩍 뛰었다.

“그 전해에 서울공고에서 열린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전라남도 대표로 출전해서 금메달을 땄던 그 홍근삼 선배가 세계 대회에서 나가서도 금메달을 땄다는 뉴스를 접하니까 온몸에 소름이 돋더라니까요. 더구나 뉴스 말미에, 양복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홍근삼 선수의 인간 승리의 스토리를 라디오 다큐멘터리 드라마로 제작 방송할 예정이라는 소식까지 나오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소리쳤어요. 그래, 두고 보라구, 나도 할 수 있어!”

이정구에게 목표가 생겼다. 물론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따겠다는 목표다.

이후, 이정구가 양복 기술을 익혀가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고초를 모두 소개할 수는 없다.

“기초부터 다시 배우자, 작심하고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양복 학원에 등록을 했어요. 처음엔 강의실 구석에서 숙식을 하며 지냈는데, 그 학원에서 유명한 기술자 한 분을 소개해 주더라고요, 그래서 그 선생님이 운영하는 충무로의 양복점에 제자로 들어갔지요. 방을 따로 얻을 형편이 안 되니까 밤이면 작업대 위에서 담요를 덮고 잤어요. 그러다가 어느 겨울날, 거의 죽다 살아난 적이 있어요. 연탄난로를 땠거든요. 그날 밤에 눈이 펑펑 내려서 습도가 높아 눅눅했어요. 연통으로 가스가 제대로 배출되지 못했던 모양이에요. 머리가 깨질 정도로 아픈데 도저히 몸이 움직여지지 않은 거예요. 어찌어찌하다가 간신히 몸을 뒤채서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죽지 않고 아직까지 잘 살고 있네요, 하하.”

이정구는 그 뒤로도 한 곳, 한 스승 밑에 안주하지 않고 기술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양복 기술자들을 일삼아 찾아다녔다. 제자를 자처하며 고생을 사서 했던 것이다.

1967년의 전국기능경기대회에 서울 대표로 출전했으나 또 한 번 낙방의 쓴잔을 마신 그는, 드디어 1969년도에 대표 선수로 선발되어서, 이듬해에 열렸던 도쿄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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