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업신문= 연승우 기자) 정부가 호남권 신규 반도체 산업단지에 하루 65만톤의 용수를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가운데, 산업용수 확보 과정에서 농업용수가 사실상 조정 대상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정부가 제시한 공급계획에는 나주댐 농업용수를 다른 수원으로 대체해 확보한 절감분 하루 10만톤을 반도체 산업용수로 활용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농업용수를 직접 산업용수로 전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정부 설명이지만, 대체 수원의 안정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농업용수 몫을 줄여 산업용수를 확보하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여기에 반도체·이차전지 등 첨단산업의 용수 확보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로 규정하려는 법안까지 발의되면서 물 부족 상황에서 농업용수가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있다는 농업계와 시민사회의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5개 댐에서 하루 65만톤 확보
기후에너지환경부가 발표한 서남권 신규 반도체 산업단지 용수 공급계획은 동복댐 30만톤, 주암댐 5만톤, 장흥댐 10만톤, 보성강댐 10만톤, 나주댐 10만톤 등 하루 총 65만톤을 확보하는 내용이다. 동복댐은 기존 여유량 5만톤과 댐을 높이는 증고 사업을 통해 25만톤을 추가 확보한다. 주암댐에서는 과다 배분됐으나 사용되지 않은 물량 5만톤을 활용하고, 장흥댐에서는 여유량 10만톤을 끌어온다는 계획이다.
보성강댐의 발전용수 10만톤은 공업용수로 전환하고, 나주댐에서는 농업용수를 대체 공급해 절감되는 하루 10만톤을 반도체 산단에 공급한다. 정부는 이 같은 수원 다변화를 통해 반도체 산업단지에 필요한 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5개 댐 모두 2022~2023년 호남지역 극한가뭄 당시 저수율이 급감하거나 다른 댐에 비상용수를 공급했던 수원이라는 점에서 ‘안정적 공급’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를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국민의힘 박수영 의원이 환경부의 ‘영산강·섬진강 유역 가뭄백서’를 분석한 결과, 동복댐과 주암댐은 당시 제한급수와 저수위 도달이 우려될 정도로 저수량이 감소했다. 광주의 핵심 식수원인 동복댐은 2023년 4월 저수율이 19.1%까지 하락했다. 같은 시기 평년 저수율 57.8%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주암댐도 2023년 4월 역대 최저인 20.3%의 저수율을 기록했다.
장흥댐 유효저수율은 24.7%까지 떨어졌고, 나주댐 역시 2022년 최저 저수율 33.1%를 기록했다. 보성강댐은 발전을 중단하고 2022년 7월부터 2023년 5월까지 총 3070만톤을 주암댐에 긴급 공급했다.
당시 호남지역 가뭄은 기상관측 이후 가장 긴 281일 동안 이어졌다. 농업용수와 생활용수, 산업용수 모두가 부족했던 수원에서 새로운 산업용수 65만톤을 추가로 확보하겠다는 계획이 현실적인지 검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나주댐 농업용수 10만톤이 핵심 쟁점
농업계에서 가장 민감하게 바라보는 부분은 나주댐 물량이다. 정부는 나주댐에서 농업용수로 사용되던 물을 다른 수원으로 대체 공급하고, 그만큼 절약된 물 하루 10만톤을 산업용수로 활용하겠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형식적으로는 농업용수를 줄이지 않고 대체 수원을 통해 기존 공급량을 유지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가뭄 상황에서도 대체 수원이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 농번기와 갈수기가 겹칠 때 농업용수 부족이 발생하지 않는지에 대한 세부적인 물수지 분석은 충분히 공개되지 않았다.
농업용수는 계절별 편차가 매우 크다. 모내기와 논물 대기, 밭작물 생육기에는 단기간에 많은 물이 필요하다. 평상시 평균 사용량만을 기준으로 여유 물량을 산정하면 가뭄과 농번기가 겹쳤을 때 공급 부족이 발생할 수 있다.
한번 산업용수 공급망이 구축되면 농업용수로 다시 돌리기도 쉽지 않다. 반도체 공장은 공정 중단 시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다는 이유로 연중 안정적인 용수 공급을 요구한다. 가뭄이 발생하면 물 배분 과정에서 농업용수보다 산업용수가 우선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이 때문이다.
반도체 공장의 경우 초순수 제조와 냉각, 세척공정에 대량의 물을 사용한다. 생산시설이 확대될수록 용수 수요도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당초 계획한 공급량이 부족해질 경우 추가 수원을 농업용 댐이나 하천에서 찾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가뭄 때 가장 먼저 줄어드는 농업용수
물 부족 상황에서 농업용수는 생활용수와 산업용수보다 상대적으로 조정하기 쉬운 자원으로 취급돼 왔다. 농업용수 공급을 줄이면 농작물 피해와 농가소득 감소가 발생하지만, 공장 가동 중단이나 도시 제한급수처럼 즉각적인 사회적 혼란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농업용수가 산업 확대를 위한 ‘여유 물량’으로 계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2021년 극심한 가뭄을 겪은 대만은 반도체 산업의 생산 차질을 막기 위해 일부 지역의 농업용수 공급을 중단했다. 대규모 휴경이 실시됐고 농업인들은 정부 보상에 의존해야 했다.
산업 생산은 유지했지만 그 부담은 농업과 농촌이 떠안은 셈이다. 반도체 생산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이유로 물 배분 우선권이 사실상 산업에 주어진 것이다.
한국에서도 첨단산업 용수 공급이 법적으로 국가와 지자체의 의무로 규정되면 유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첨단산업 용수 확보 법제화 추진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은 지난 6월 물관리기본법과 수도법, 환경기술 및 환경산업 지원법 개정안 등 3건을 대표 발의했다. 이 가운데 물관리기본법 개정안은 반도체와 이차전지 등 국가첨단전략산업의 안정적인 유치와 발전을 위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필요한 용수 공급방안을 검토하고, 관련 계획에 반영하도록 노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안 제안이유에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산업이 기존 산업보다 많은 물을 사용하고 있어 안정적인 용수 공급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반도체산업의 정의로운전환을 위한 공동행동은 이들 법안에 대해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 산업에 물 공급 우선권을 부여하려는 것”이라며 통과에 반대하고 있다.
현행 물관리기본법 제14조는 국가와 지자체가 물의 편익을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물을 합리적이고 공평하게 배분하고, 생태계 건강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첨단산업의 용수 확보 의무가 별도의 조항으로 명시되면 가뭄과 물 부족 상황에서 산업용수가 정책적으로 우선되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게 공동행동의 주장이다.
법안 자체에 생활용수나 농업용수보다 첨단산업 용수를 먼저 공급해야 한다는 직접적인 조항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국가와 지자체가 첨단산업 용수 확보를 검토하고 관련 수도계획에 반영하도록 하면, 실제 행정과 예산은 산업용수 시설 건설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농업용수 보호를 위한 별도의 우선순위나 최소 공급량은 법안에 구체적으로 담기지 않았다.
수도기본계획 단축, 산업 수요 신속 반영
수도법 개정안은 수도 관련 기본계획의 타당성 재검토 주기를 기존 5년에서 2년으로 줄이고, 수도사업자가 아닌 주체도 일정한 수도사업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첨단산업의 용수 수요 변화를 수도계획에 신속하게 반영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특정 산업단지의 용수 수요에 맞춰 계획을 자주 변경하면 지역의 장기적인 물관리보다 기업의 투자 일정이 우선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또 기업이나 산업단지 사업자가 수도시설 건설에 직접 참여하게 되면 물 공급체계가 공공의 필요보다 산업 수요 중심으로 재편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용수 공급시설에 산업계의 자본이 대거 투입되면 이후 가뭄 상황에서 해당 산업의 공급권을 축소하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기업이 투자한 시설이라는 이유로 산업용수가 사실상 고정된 권리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공급 확대보다 수요 관리 먼저
정부의 용수정책은 새로운 댐을 건설하거나 기존 댐을 높이고, 다른 수원의 물을 끌어오는 공급 확대 방식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기후위기로 가뭄이 장기화·상시화되는 상황에서는 공급량을 계속 늘리는 방식만으로 산업용수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 반도체 산업 내부의 물 재이용률을 높이고 공정별 물 사용량을 줄이는 대책이 우선돼야 한다. 산업단지 입지를 결정할 때도 물 공급능력을 고려해 규모를 제한하거나 단계적으로 개발해야 한다.
지역에 확보된 물을 기준으로 산업 규모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단지 규모를 먼저 정한 뒤 필요한 물을 주변 지역과 농업용 수원에서 끌어오는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특히 농업용수를 대체한 뒤 절감분을 산업용수로 사용하는 정책은 대체 수원의 가뭄 대응능력과 농업 피해 가능성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
나주댐 농업용수 10만톤을 반도체 산업용수 계획에 포함하려면 최소한 농번기 최대 수요와 2022~2023년 수준의 극한가뭄이 동시에 발생했을 때도 농업용수 공급이 유지되는지를 공개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대체 수원 공급이 실패하거나 부족할 경우 산업용수보다 농업용수를 우선 복원한다는 원칙도 필요하다.
농업용수 최소 보장제도 마련해야
농업용수는 단순히 농업 생산을 위한 경제적 자원이 아니다. 농업 생산기반과 식량안보를 유지하는 필수 자원이다. 물을 공급받지 못해 농사를 짓지 못하면 해당 연도의 농작물 생산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농가의 영농 중단과 농지 이탈, 지역 농업기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첨단산업 용수 공급을 제도화하려면 생활용수와 농업용수의 최소 공급량을 먼저 법률로 보장해야 한다.
가뭄 단계별 물 배분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산업용수 공급으로 농업용수가 감소할 경우 대체 수원과 피해보상 책임을 사업자가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 농업용 댐이나 농업용수 절감분을 산업에 사용할 경우 농업인과 지역주민의 사전 동의를 의무화하는 절차도 필요하다.
현재 논의되는 물관리 법안은 첨단산업의 안정적인 용수 공급 필요성은 구체적으로 명시하면서도 농업용수와 생태용수의 보호 장치는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다.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도 중요하지만, 물이 부족할 때 누구의 물을 줄일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없이 공급시설부터 확대해서는 안 된다.
호남 반도체 산업단지 하루 65만톤 공급계획은 단순한 산업기반시설 계획이 아니다. 향후 가뭄이 발생했을 때 농업과 산업 가운데 어디에 물을 우선 배분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물관리 체계의 전환이다.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 농업용수를 줄이고 농사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 산업정책은 지속 가능하다고 보기 어렵다. 첨단산업에 물 공급을 보장하기에 앞서 농업용수와 식량생산 기반을 먼저 지키는 원칙이 마련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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