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1년 7월 1일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박정희는 취임사에서 “경제성장의 결실이 일부 계층과 도시에만 집중되어서는 안 되며, 농어민과 근로대중에게 고르게 돌아가야 한다. 농어촌 근대화와 농어민 소득 증대를 적극 추진하여 도시와 농촌이 함께 발전하도록 하겠다”라고 말하면서 도농병진을 선언한다. 이 담화 이후 도농병진 선언은 농촌근대화사업, 농업기반사업, 농협금융 확대, 새마을운동, 농가부업 장려 등으로 구체화했다.
‘잘살아 보세’ 구호로 시작된 농촌근대화사업은 초가지붕 개량, 마을길 확·포장, 교량·소하천 정비, 농촌전기 보급 확대, 공동우물·상수도 설치, 공동창고 및 마을회관 건립으로 이어졌다. 농업생산기반정비사업은 농지 정리, 관개시설 확충, 배수 개선, 경지 확장, 기계화 보급으로 확대된다.
한편 ‘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한국경제가 빠르게 성장했음에도 농어촌 주민들의 소득은 상대적으로 낮아 도농 간 격차가 확대되면서 쌀 증산과 함께 ‘농어민 소득 증대 특별사업’을 추진했다. 핵심 목표는 ① 소득 증대에 따라 수요가 증가하는 품목 생산 증대 ② 수출품목 집중 개발 ③ 주산지 조성 방식으로 지역농업 개발 ④ 생산성 향상과 유통 지원으로 농어민 소득 증대였다. 이에 따라 축산, 잠업, 특용작물, 원예작물 등 21개 품목을 대상으로 137개 지구에서 75만호 농어가가 참여해 사업이 추진됐다.
특히 소득 증대 우수 농가를 선발하여 독농가 연수반과 새마을 지도자 교육을 통해 새마을운동 핵심 지도자 양성에 적극적이었다. 이 사업은 1974년 새마을사업 3대 사업 분야에 흡수돼 1981년 사업목표를 제시했다. 농가소득을 140만원(농업소득 71만원, 농외소득 69만원)으로 설정했다.
제2차 농특사업에서 주목되는 지점은 농업소득보다 농외소득 증대에 중점을 뒀다는 사실이다. 농촌지역에 농어촌부업단지를 확충하고 새마을공장을 유치하여 노임소득을 높인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으로 농가소득에서 농외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은 1975년 18.1%에서 1979년 31.3%로 높아졌다.
통일벼 재배 강요로 농민들 불만 증가
주곡 자급 달성을 위해 전 행정을 동원하여 1971년 전국 550개의 통일벼 재배 시범단지를 설치하고 845호의 농가가 참여했다. 시범단지에서 생산된 통일벼 1만2000톤은 정부가 매입하여 종자로 농가에 보급했다. 재배 기술 확산을 위해 ‘양곡관리특별기금’으로 1870명의 기술지도원을 꾸려 전국에 파견했으며, 1972년을 ‘증산과 절약의 해’로 지정하여 전국 2만2945단지 18만747ha의 논을 확보하며 통일벼 재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냉해와 가뭄으로 인해 재배가 실패하면서 정부는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피해보상을 해야 했다. 재해 피해와 행정의 강제적 재배 강요로 인해 농민들의 통일벼 재배 기피 현상이 확산하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1973년 이후 쌀 다수확농가 시상, 벼농사 150일 작전 등을 전개했다. 150일 작전은 쌀 생산량 증가를 위해 모내기부터 수확기까지 중요 영농작업에 대해 5단계로 작전 단계를 설정한 것으로 그 단계에 따라 세부 실천 내용을 규정하는 등 관이 총동원돼 추진했다. 1974년에는 이를 7단계로 세분화시켜 종자 선택과 못자리 설치를 추가한다. 또한 유신, 밀양21호·23호, 수원258호 등 신품종 종자를 추가 공급하고 화학비료·농약 공급을 확대하는 정책을 보완했다.
그 결과 1977년에는 통일벼 재배면적이 전체 면적의 54%에 달하며 대풍작을 이뤄 주곡 자급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반미 재배 농가의 못자리를 공무원들이 훼손하는 등 강압적 사업 추진으로 많은 부작용도 발생했다. 또한 통일벼 수매 물량 부족과 생산비 조사 왜곡 등으로 농민들의 불만이 증가했다.
1975년부터 쌀 생산량 증가, 이중곡가제에 따른 재정 부담 확대, 정부미 보유 증가, 물가안정 필요성에 따라 수매량이 줄어들었고, 지역 생산량에 따라 수매제를 할당하면서 통일벼 중심 선별 수매 구조로 전환됐다.
한편, 산업화로 국민소득이 증가하면서 미질 저하로 인한 소비자 외면 현상이 나타났고, 미질 개선과 다수확을 위해 보급된 ‘노풍벼’ 재배 과정에서 도열병이 창궐하여 재배면적의 86%가 피해를 봤다. 결국, 1978년부터 이어진 흉작으로 생산이 급감하여 쌀이 부족해지면서 외국쌀을 대량으로 수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주곡 증산운동에 대한 농민 증언
한국가톨릭농민회 초기부터 활동한 정성헌씨와 유남선씨는 당시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한 주곡 생산에 모든 행정력이 동원됐다고 증언한다. 마을마다 담당 공무원을 두고 못자리부터 수확시기까지 감시했다고 한다. 전남광주 보성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농사지으며 농민운동을 해온 문경식 전 전농 의장 증언에 따르면 마을 이장과 지도자는 옛날로 치면 원님이어서 일을 시키면 누구 하나 거역할 수 없었다고 한다.
농민들은 수확량은 많으나 밥맛이 없고 나락이 잘 떨어지면서 병충해에 약한 통일벼를 기피했지만 정부의 증산을 위한 강압으로 통일벼 재배를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부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당시 사례에서 엿볼 수 있다. ‘일반벼를 심기 위해 만든 못자리를 짓밟아 버리고 갈퀴질을 해버린 만행도 저질렀다’라고 이야기한다.
1978년 어쩔 수 없이 심은 ‘노풍벼’는 특히 병충해에 약해서 이삭이 패기 시작할 무렵부터 썩어 농약을 들이부어도 맥없이 쓰러져 대다수 재배면적에서 수확을 못 하는 피해를 봤다고 한다. 한편, 주곡 증산운동은 새마을운동과 연계돼 당시 시멘트 몇 포를 마을에 배당하면 마을 주민을 총동원하여 다리를 놓고 길을 닦게 했다. 그러나 품삯은 주지 않았다.
강제 노역에 대한 증언은 경기 평택의 한도숙 전 전농 의장, 경남 진주의 정현찬 전 전농 의장, 강원 원주의 농민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마을길은 물론이고 국도, 지방도도 마을마다 구역을 정해 관리했다고 증언한다. 문 전 의장은 노역에 강제 동원되고도 저항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관제 사회였다고 회상했다.
강원 춘천에서 지금도 소를 기르며 농민운동을 하고 있는 이승열 전 춘천농민회 회장은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977년 고향으로 귀농해서 농사를 시작했는데 새마을운동이 한창 때였다고 한다. 다리 놓기, 길 닦기도 했는데 그것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퇴비 생산이었다. 면 공무원들이 얼마나 독려를 하는지 지겨울 정도였다고 한다. 16개 마을별로 경쟁을 시켜 매일 풀을 베 퇴비를 만들어 시상했다.
농업정책이라고 할 건 없고 공무원들이 시키는 일이 정책이었다고 기억한다. 정책을 설명하고 자발적으로 따라오게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해서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고 증언한다. 통일벼를 시키는 대로 심어 1978년엔 담보당 600kg을 생산해 수확왕에 선발되기도 했다.
‘한강의 기적’ 이뤘지만 농업은 소외
주곡수매제 축소와 복합영농의 확대는 다양한 상업적 농산물 재배로 이어졌다. 그러나 농민들의 상업적 농산물 재배는 생산량 증가와 수입농산물의 급증으로 인한 가격 폭락으로 이어지며 농가경제의 어려움에 봉착했다.
1960~1970년대 한국 농업은 식량의 절대적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미곡 증산을 핵심 사업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주곡 자급은 어느 정도 달성했지만, 농촌 현실은 저농산물 가격, 농산물 수입 확대, 농촌 인구의 급속한 이농 등으로 점차 악화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화가 진행되며 ‘한강의 기적’이 이뤄졌지만, 농업 부문은 상대적으로 소외됐다. 미곡 증산 정책으로 식량자급률은 1971년 69.4%에서 1979년 76%로 다소 상승했으나, 같은 기간 양곡 수입량은 267만톤에서 350만톤으로 오히려 증가했다. 이는 쌀 중심 정책으로 인해 밀, 옥수수, 콩 등 기타 식량작물의 생산 기반이 약화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부는 ‘주곡 증산 운동’과 ‘농어민 소득 증대 특별사업’으로 농가소득 향상을 시도했으나,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주곡을 제외한 식량자급률은 계속 하락했고, 연 소득 100만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농가가 전체의 52%에 달했다. 이들의 소득은 최저 생계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영세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동했고, 그 결과 1970년대 10년 동안 약 400만명의 농촌 인구가 감소하여 1981년에는 농업 인구가 1000만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한편 농가 인구가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작 비율은 오히려 24.6%에서 46.4%로 증가했다. 이는 농업 구조의 불균형이 심화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농지 확대와 신품종 재배를 통해 보릿고개를 극복하려던 정부의 노력은 한계를 드러낸 채 1980년대를 맞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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